일 년이 한 장의 꽃잎만을 남기고 있다
현재를 뜯어 과거를 만드는 게 싫다며
달력은 아직 한 여름 바다에 머물러 있다
까막눈처럼 웃는 숫자, 그날들에 나는 없다
흐릿한 기억이 아니라 아예 깜깜한 어둠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순순히 보내야지, 그래 놓고
나는 달력 한 장에 "사랑하지 않는다"
또 한 장에 "사랑한다" 운명을 점친다
과거는 첫 행을 채우기 전 게을러져서 여백이지만
미래는 하루하루 슬기롭고 치열하게 살아내리라
사랑하지 않고 방치한 11월의 고해성사를 뜯어내고
드디어 남은 "사랑한다"는 달력 한 장에 흐뭇해져
사랑하지 않고 허송세월한 숫자들은 버려졌지만
고맙게도 아직 한 달이나 남았잖아, 사랑할 날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