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짧지않은 생을 살아온건지. 올 해 몇 살이 되었나를 나이 계산기에 생년월일을 두드려 넣어보고나서야 정확히 알게되었다. 이젠 누가 물어보는 일도 거의 없고 생일을 유별나게 챙기지도 않으니. 알아도 별 소용이 없는게 내 나이다.
공교롭게도 요새 관심있게 읽고 있는 책 <인간실격>의 작가 다자이 오사무도 <진달래 꽃>의 김소월 시인도 젊을 때 생을 마감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온다. 요절한 작가들은 항상 젊은 모습의 사진을 프로필로 쓰니 그건 부럽지만. 그렇다고 일찍 죽고싶진 않다는. 하지만 늙수그레한 프로필로 자신이 기억되는게 너무 싫다는 하루키. 섬세하다고 해야할지. 별걸 다 신경쓰는구나 싶기도 하고. 세계적인 작가도 요런 면이 있네. 귀엽기도 하다.
다들 가는 길이니 이 길이 맞겠거니 생각하며 그 길로만 앞서거니 뒷서거니 내달린 적이 있다. 내 앞에 선 이가 있으면 무조건 제치고 싶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나 어떡해...ㅠ 부모도 어찌해줄 수 없고. 날 사랑하는 이도 어쩌지 못하는. 교착 상태. 그것은 공포였다. (그건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음을. 아주 먼 훗날에야 알게 되었다.)
그 알 수 없는 오묘한 무게를 견디면서. 주저앉아 울기만했던. 젊은날의 길. 그 길을 지나자 중년의 열갈래 길이 나타났다. 그러나, 정말 감사하게도, 그 중 내가 가고싶은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앞으로 내가 가게될 길도 여전히 가리워진 길. 그렇지만 예전만큼 공포스럽진 않다. 그만큼 나는 이 세상에 익숙해진 거겠지만. 바람에 이리저리 굴러다닐지언정. 머무르지 않고. 뿌리내리지 않지만. 살아있는 사막의 식물 이오난사처럼. 어느 길 위에 서 있다해도 담대한 나 자신을 보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작은 기대를 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