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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엠 Jan 13. 2017

그 곳에 중경삼림이 있었네

청킹맨션 내부를 걷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 1994)'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홍콩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시린 아련함으로 다가온다. 마치 젊은 날 실연의 아픔과 옛사랑의 기억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추억의 장소나 되는 것처럼. 이 영화의 첫번째 에피소드에 출연한 [경찰233] 역의 금성무와 [마약 밀거래상] 역의 임청하가 주로 촬영했던 '청킹맨션(重慶大廈, Chungking Mansions)'에서 이 영화의 제목이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즉, '중경삼림'에서 "중경"을 광동식으로 발음하면 '청킹맨션'의 "청킹"이 된다.


영화 속에서 레인코트를 입고 금발가발을 쓴 임청하가 뛰어다녔던 청킹맨션 (사진출처: sofiabroadcast)


1961년에 완공된 청킹맨션은 원래 중국인 중산층들의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A부터 E까지 총 5개의 블록으로 나뉜 17층짜리 건물 내부에는 각각의 구역에서만 운행되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당시에는 한번쯤 살아보고싶은 구룡반도 최고 중심가의 현대식 아파트로 인기가 있었을 것 같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청킹맨션의 모습 (사진출처: Wikipedia)


지금은 홍콩에서 가장 싼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인도 음식점, 아프리칸 음식점, 환전소, 그리고 맞춤 와이셔츠/양복점 등과 같이 대부분은 중동이나 아프리카, 인도와 파키스탄계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사업이 성행하는 곳이 되었다. 낡고 비좁은 엘리베이터에 짐까지 실어 나르기 때문에 한번에 성인 너댓 명도 타기 어렵다. 치안도 우려스러운 곳이라 홍콩의 어느 건물보다 CCTV가 많이 설치되어있다.


청킹맨션 곳곳에 설치되어있는 수 많은 CCTV들만이 그나마 안전을 지켜준다.


1990년대 청킹맨션은 마약과 범죄, 그리고 불법체류자들의 소굴로 악명을 떨쳤다. 영화가 개봉된 이후인 1996년에 홍콩 경찰이 코드네임 "사하라"라는 작전을 펼쳐서 이 건물에 숨어있던 범죄자들을 대대적으로 소탕했다고 한다. 이 곳에 대해 대부분의 홍콩인들은 지금도 그리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왕가위 감독의 촬영기법처럼 청킹맨션 안을 빠르게 걸어가면서 찍어봤다.


인도음식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인도 카레를 좋아하는 필자가, 청킹맨션 안에 값싸고 맛있는 인도 음식점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도 큰 용기를 내야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그러나 한 번이라도 가보는 것과 아예 가보지 않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럴때 내 선택은 늘 가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청킹맨션 안에 있는 인디언 식당 중 리뷰가 좋았던 델리클럽(The Delhi Club)과 타지마할 클럽(Taj Mahal Club) 중 하나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주로 동남아시아나 중동 혹은 아프리카에서 온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상점들을 많이 볼 수 있는 청킹맨션 내부


이 건물의 입구 주변을 지날 때마다 정확한 한국어로 "아가씨, 짝퉁시계 있어요"라고 속삭이는 호객꾼들이 있는데, 필자는 한 번도 따라가 본 적이 없어서 어떤 식으로 거래가 일어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대신 "타지마할"이라고 외치니 그 소리를 듣고 어디선가 나타난 분이 자기가 안내할테니 따라오라고 했다. 미로처럼 생긴 건물 안 비상계단을 통해 건물 깊숙이 필자 일행을 이끌고 갔다. 반신반의하면서 조심스레 그를 따라갔다.   


필자를 인디언 식당까지 안내해 준 호객꾼 아저씨. 더디게 따라가자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신다.


호객꾼이 안내해준 대로 식당 내부에 들어가자 마침 홍콩인 미식 블로거라는 사람과 그 일행이 취재차 식당 주인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미식 블로거가 찾아올 정도면 나름 괜찮은 곳이겠구나 하는 생각에 일단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간판이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이 되어있었던 인디안 식당 "타지마할"


긴장이 풀려서인지 갑자기 목이 타서 시원한 망고 라시(Mango Lassi, 망고가 들어간 인도식 발효음료)부터 먼저 주문한 후, 찬찬히 메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좋아하는 탄투리 그릴(Tandoori Mixed Grill)이나 닭고기 티카 마살라(Chicken Tikka Masala)를 비롯해 다양한 커리들이 많이 있었다.



무엇부터 주문하면 좋을지 망설여져서 종업원에게 오늘의 추천 메뉴를 물었다. 4인 기준에 맞춰 애피타이저, 카레와 바비큐 메인 메뉴 3개에 샤프론 밥과 갈릭 난 브레드 및 음료를 제공하는 세트 (홍콩달러 400원, 한화 6만원 정도)가 있는데 어떠냐고 하기에, 그 정도면 합리적인 가격인 것 같아 흔쾌히 '오케이'라고 했다. 어느 나라에서 왔냐고 묻길래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일본어랑 한국어가 많이 다르냐는 질문과 Curry를 한국말로 어떻게 부르냐는 질문을 했다. 손님에게 나름 친절하게 잘 해주려는 태도로 이해가 되었다.

       


요리가 순서대로 나오는데 하나같이 정말 맛있어서 그릇들을 싹싹 비웠다. 겨울방학이라 홍콩에 놀러 온 필자의 고등학생 조카들도 입맛에 딱 맞다며 아주 좋아했다. 물론 카레를 좋아하는 게 집안 내력일 수도 있겠지만, 낯선 음식도 거부감을 가지지 않고 잘 먹는 모습을 보니 함께 오길 잘 했다는 생각에 흐뭇했다.


밤이 깊어진 침사추이 청킹맨션 주변의 모습 (사진출처: universiablogs)


왕가위 감독이 청킹맨션에서 영화를 찍고 제목에도 가져다 쓴 이유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곰곰이 생각을 해 보았다. 어쩌면 감독에게 청킹맨션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삼림(숲)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 숲을 단순히 겉에서만 본 사람은 청킹맨션을 위험한 빌딩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고 노골적인 거부감을 드러냈을 것이다. 그러나 숲의 내부로 들어와 천천히 혹은 빠르게 걸어본다면 비로소 원산지도 다른 갖가지 나무들이 어우러져 군락을 이룬 것을 보게 된다. 해외 각국에서 온 가난한 이민자들과 여행자들이 마치 그 나무들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가는 그들만의 치열한 삶의 현장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청킹맨션이다.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를 필름에 잘 녹여낸 명화가 바로 '중경삼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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