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아주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어 그림을 그려봐야겠다고 마음먹은 후 무엇을 젤 먼저 그릴까를 고민했다. 그리고싶은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우선은 내 실력을 십분 고려해서 그릴 수 있는 것부터 순서를 정해봤다. 일단 사진-움직이지 않는 것, 혹은 빛이 이미 정해진 것-을 보고 그림을 그려보기로 했다.
오래전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일본 식물도감 한 권이 그런 면에서 요즘 내 수채화 교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예쁜 식물과 그 열매들이 아름답게 나열되어 있어서 그리면서도 재밌고 책 내용을 통한 배움도 있다. 다만 책에 있는 사진들은 이미 필터링이 되어 원래의 색상 그대로라고 보기엔 조금 한계가 있기에, 예전에 본 적이 있는 것들은 내 나름의 기억을 되살려서 채색을 하였다.
다른이의 책에 기대지 않더라도 그림 소재는 많이 있다. 나 역시 집 주변에서 보게 되는 화려한 꽃들의 사진을 취미 삼아 종종 찍어왔더랬다. 마치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에 나오는 그것처럼 꽃송이 안쪽의 은밀한 느낌을 주로 찍었는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 사진들도 그림으로 치환하기 좋은 매개가 되어주었다. 아래는 우리 집에서 해마다 꽃을 피워온 행운목을 그려본 것이다. 빵빵하게 부풀대로 부풀어 오른 꽃망울 그 안에서 달콤한 꿀 한 방울이 새어 나온 그 장면을 그렸다.
어느 날 여성잡지의 한 면에 피어있는 꽃이 하도 예뻐서 그것도 그림으로 옮겨두었다. 그림으로 그리면서 사진과 100% 똑같이 그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다만 내가 아름답다고 느꼈던 그 느낌을 그대로 살려보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전문적인 테크닉이 없기에 그 좋은 느낌을 충분히 살리려면 어떻게 채색하면 좋을지를 붓을 들기 전부터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 홀로 그림을 배우는 과정은 한 계단 한 계단을 온전히 내 힘으로 밟아가는 느낌이다. 마라톤을 해본 입장에서 그것과 비슷하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림실력도 생각의 힘과 함께 자라나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필자가 사용한 엽서 크기의 수채화 종이는 대부분 이 사이즈대로 시중에 나와 있는 제품이고, 뒷면이 실제 엽서처럼 프린트되어 있다. 여기에 그림을 그리면 짧은 시간에 완성할 수 있는 아담한 작품을 만들 수 있어서 좋다. 위의 식물도감처럼 시리즈로 만들어 손쉽게 정리할 수도 있고 친구들에게 사연을 담아 선물하기도 괜찮다. 몇몇 친구에게 실제로 선물해봤는데 정말 감동이라며 큰 호응을 해주었다. 그런 반응들이 내게 더 큰 행복으로 다가와서 하루에 단 몇십 분이라도 다시 붓을 들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