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lectivum XXVII
[기존 블로그에서 이사 온 글]
선입견은 무섭다.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과 혐오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불확실한 단점만을 보게 만들기도 하며, 무엇보다 어떤 대상에 대한 숨겨진 보석같은 가치를 볼 수 없게 만든다.
수많은 선입견 속에서 우리 각자는 선입견을 어떻게든 극복해보려 노력한다. 하지만 눈과 귀를 열면 열수록 넘치는 정보들로 되려 혼란스러운 순간이 더 많아져 무엇이 옳은 것인지, 선입견과 팩트의 갈림길에서 머리가 더 아파지기도 한다.
나는 선입견이 없는 사람이고 싶은데,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다양한 선입견에 갇혀있는 나를 발견할 때 스스로 약간의 자괴감과 함께 결국 나도 어쩔수 없구나 하며 내 그릇의 부족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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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스키 척척박사가 되고싶다는 먼훗날의 장래희망을 이루기 위해 왠만하면 새로운 위스키를 다양하게 츄라이 해보는 스타일인데, 그럼에더 불구하고 한가지 선입견을 가지고 잘 마시지 않는 종류의 위스키가 있다.
그 위스키는 바로 블렌디드 위스키인데, 소위 우리가 "양주"라고 부르는 부류의 위스키이다. 발렌타인, 조니워커, 시바스리갈 등과 같이 대중적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위스키 브랜드들은 대부분 블렌디드 위스키이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따로 증류소를 가지고 있지 않고 보통은 싱글몰트 위스키들을 좋은 배합으로 섞어서 만든다. 사실 위스키 고수인 분들은 블렌디드 위스키가 궁극의 맛을 낸다고 하시기도 하지만, 나에게 블렌디드 위스키는 싱글몰트에 비해 느낄 수 있는 맛과 향이 떨어진다는 생각, 다시말해 선입견이 있어 거의 마시지 않는 종류의 위스키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들렀던 단골바에서 나의 취향을 잘 아는 바텐더 분이 정말 꼭 추천하고 싶은 위스키가 있다며 말씀을 주셨다. 내 위스키 취향을 워낙 잘 아는 분이시니 당연히 싱글몰트나 독립병입중에서 새로운 것을 추천해주시겠거니 싶었는데 왠걸 난생처음보는 브렌디드 위스키 한병을 들고 오셨다.
바텐더님 추천에 대한 신뢰는 있었지만 블렌디드 위스키는 뭐 그래도 다 똑같지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한모금 마셔봤는데, 그 순간 정말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어떤 싱글몰트에 뒤쳐지지 않은 훌륭한 맛과 향에 내가 마신게 블렌디드 위스키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달달하면서도 깔끔하고, 상큼하면서도 마지막은 살짝 스모키한 향이 나는 와중에 도수가 높은 위스키 특유의 강렬한 느낌이 있어 너무나 훌륭했다. 올해 들어처음으로 마신 블렌디드 위스키였는데, 말도 안되는 맛과 향에 말그대로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이 위스키는 세계에서 가장 위스키 증류소를 많이 보유한 기업 중 하나인 디아지오에서 그들이 보유한 28개의 증류소 위스키의 캐스크 스트랭스, 즉 위스키 원액들만 모아모아 만든 위스키다.
디아지오가 소유하고 있는 위스키 증류소에는 달위니, 오반, 탈리스커, 라가불린, 쿠일라, 크라겐모어, 모트락 등 우리에게 잘알려진 우수한 증류소도 대거 포함되어있다. (사실 가장 유명한 블렌디드 위스키 중 하나인 조니워커도 디아지오의 소유다!) 이런 좋은 싱글몰트 위스키들 중에서도 액기스인 캐스크 스트랭스만 모아 최고의 배합으로 맛과 향을 냈으니, 눈이 번쩍이는 위스키가 될 수 밖에!
대부분 싱글몰트를 고집하며 가끔 버번, 라이 정도만 찾아 마시던 나에게 콜렉티범 28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블렌디드 위스키도 맛있고 훌륭할 수 있구나, 나의
위스키 공부는 아직 갈 길이 몹시 멀구나를 느낄 수 있는 위스키 시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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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정말 좋아하는 위스키에도 선입견이 있어 이런 훌륭한 위스키를 못마셔볼뻔 했는데, 지금 내 삶과 생활 속에 나에게 스스로 한계를 짓는 선입견은 얼마나 많을까. 여러가지 상황을 마주하며 쉽게 스트레스 받고 실망하고 혹은 힘들어하는 순간들이 어쩌면 '이건 이래야하는데' 혹은 '저 사람은 왜 내 생각과 같지 않지' 등의 이해의 폭을 좁히는 얕은 생각과 선입견 때문이 아닐까.
끝없이 비가 내리는 8월 장마 기간을 힘겹고 힘차게 뚫고 나가고 있는 요즘, 지난 봄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블렌디드 위스키를 생각하며 오랜만에 쓴 열한번째 위스키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