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차 은행원의 웃기 어려운 순간들
은행 창구에 십년 정도 있다보면 정말 온갖 종류의 인간군상들을 마주하게 된다. 더욱이 나는 입출금 창구, 대출창구, vip 창구에 대기업 담당까지 골고루 맡아봤지만 사람은 참 다양함에 끝이 없다. 그다지 특별하게 친절함을 베풀지 않았음에도 너무 고마웠다며 ‘고객의 소리’를 써주시는 분들이 있다. 반면 점심시간까지 반납해가며 어려운 업무를 최선의 노력을 다해 해결했음에도 ‘점심시간이라 창구직원들이 별로 없다’ ‘처리시간이 오래걸렸는데도 사과한마디가 없다’ 는 등의 민원들이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
그중에서도 점심시간 관련한 민원들이 참 많다. 왜 내가 귀한 점심시간 쪼개서 은행에 왔는데 직원들이 내 허락도 없이 밥을 먹으러 가냐는 고객들. 생각보다 정말 많다. 그 직원들이 유일한 휴식시간인 점심시간을 한시간도 채 못쓰고 식당에서 빨리 나오는 아무 음식이나 흡입하곤 소화제 털어넣고 자리에 앉았다는 걸 알고 있을까. 만성위염과 역류성 식도염에 시달리는 직원들이 대다수다. 경기도나 지방의 거점 점포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점심시간을 아예 쓰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끼니는 당연하게 건너뛰고 4시 마감 이후에 다같이 분식으로 허기를 겨우 달래는게 전부인 직원들도 많다. 이런사실을 알고도 민원을 넣는 사람들은 대쪽같이 화를 낸다. '내 소중한 점심시간을 직원 너희들이 빼앗았다고.'
점심시간 민원은 고객들도 맘이 급하니 그러려니 하면서 적당히 넘긴다. 나는 밥을 못먹고 일하지만 그저 미안하다고 말한다. 옆 직원 업무까지 대직하느냐고 두 세배로 힘든건 남은 직원의 몫인데, 미안함도 그의 몫이 된다. 미안하다고 해도 곱게 넘어가지 않는 고객들이 대다수이기에 금감원 민원만은 막고자 납득할수 없는 상황에도 그냥 머리를 조아린다. 내가 사과하고 미안해하면 그래도 이 사람의 화풀이가 더 번지지 않고 내 선에서 끝나지 않을까 싶은 실낱같은 희망으로. 욕받이가 되는 것도 처음이 힘들지 나중엔 프로 욕받이로 변신한다. 온갖 욕을 먹다보면 오히려 진짜 정당한 민원에 진심으로 반응하게 된다. ‘이건 우리가 정말 미안할 일이야’ ‘진심으로 사과하고 더 잘해주자. 이 분이 화낼정도면 진짜 우리가 잘못한거야’ . 아주 가끔 올라오는 정당한 민원에 감사할 지경이다.
넘치는 민원중에서 도저히 대응이 힘든 민원은 ‘웃는게 너무 기분나빠’ 라는 민원이다. 놀랍지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저런 이유로 민원을 넣는다. 입행한지 3주쯤 되었을 때 입출금 창구 팀장님이 난처한 팀원을 돕고자 뒤에서 환히 웃으며 해당 거래에 대해 고객님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드렸다. 내가 보기엔 고객님의 마음을 풀어드리며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였는데 그때 고객에게서 돌아오는 말은 ‘웃는게 너무 가식적이야. 짜증나’ 였다. 그래도 팀장님은 내내 웃으며 설명을 끝내셨다. 그리곤 너무 놀라서 얼어붙은 나에게 ‘이게 우리 일이야’ 라고 쿨하게 말씀 하셨다. 가볍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씀하셨던 ‘우리 일’. 그 팀장님은 당시 과장이었지만 지금 부지점장님이 되셨고 그때 주임이었던 나는 고참 대리가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고객들은 점점 더 격렬하게 우리의 웃음을 지적했다. 옆에 있던 과장님은 고객이 궁금해했던 49번째 질문까지 친절하게 답하다가 또다시 반복된 50번째 질문에 약간 지침을 드러냈다. 그랬더니 몇시간 후에 바로 민원이 들어왔다. 충분히 웃으면서 설명하지 않아서 너무 불쾌감이 생겼다고. 웃음에 대한 민원에는 나도 피할 수가 없었다. 미화 백불을 매번 열군데에 달하는 해외 선교기관에 보내는 천주교 사단법인 담당자 분이 있었다. 열 군데가 모두 다른 곳이기에 매번 수작업으로 한 시간이 넘게 그 고객님의 업무를 열심히 처리했다. 외화송금 수수료는 원화로만 내야했지만 고객님은 매번 외화통장만 가져오셨고 이것이 은행 내부 감사에 지적되었다. 딱 떨어지는 원화금액을 출금할 수 없어서 고객님에게 3원, 5원을 덜 받거나 더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이 횡령의 징후로 보였기 때문이다. 상황을 고객님에게 상세하게 설명하곤 추후 원화로 수수료 결제를 해주십사 부탁을 드렸다. 그때부터 쩌렁거리는 호통이 시작되었다. 호통과 함께 비난이 시작되었고 역시나 인신공격은 빠지지 않았다. 늘 모니터를 보고 다다닥 타자를 치는 김대리의 웃음이 본인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고. 소액 송금을 하는 본인을 무시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물론 우리 팀장님까지 나서서 이해되지 않는 사과와 해명을 번갈아 했지만 그날 오후 에이포 용지 세장분량의 민원이 접수되었다. 똥같은 민원 속에는 또 다시 내 웃음이 거론되었다. 매번 각기 다른 열 건의 송금을 처리하느라 긴 시간동안 고객을 앉혀두어 민망함에 허허 웃었던 것이 그토록 거슬렸을 줄이야. 마리아님이 이순간에 과연 웃고 계실지 궁금했다 .
직간접적으로 겪은 수많은 웃음민원들 덕분에 나는 언제부턴가 적당하게 기계적인 웃음만 짓게 되었다. 재미없어도 웃고, 화가 나도 웃고, 어이없어도 젠틀하게 웃는 로봇이 된 느낌이었다. 진심을 담아 웃지 않으니 오히려 웃음으로 인한 민원은 제로에 가깝게 줄었다. 잘 웃어서 좋다는 고객들은 줄었지만 덕분에 나는 평화를 얻었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입술이 수평이 될때까지만 웃으라고 조언하게 되었다. 모처럼 나는 십년만의 휴직으로 편하게 웃지 못하는 나날들을 벗어났다. 여전히 나의 동료들은 온갖 민원들에 시달리고 맘편히 웃지 못한다.
나도 모르게 차가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던중 웃음이 참 시원한 택시기사를 만났다. 푸켓에 머문지 4주차가 되는 지금에도 항시 긴장해서 굿모닝, 해브어 나이스데이, 땡큐 정도로 모든 대화를 마무리 했었는데 오늘 만난 택시기사 덕분에 딱딱했던 마음이 와르륵 무너졌다. 처음에는 아침부터 왠 신변잡기를 하나 싶어 택시기사가 말거는 것이 참 귀찮았다. 그런데 한국에 대해 생각보다 많이 알고 있고, 예상보다 진지한 그의 태도에 어쩌다 맘을 열고 대화하게 되었다. 푸켓이 좋냐는 그의 물음에 진짜 나의 마음을 몇 문장으로 늘여서 이야기 했다. ‘너무 조용하고 좋은데 여기 내 친구가 없어서 약간 외롭다.’ 그러자 내 마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는 듯한 그의 대답. ‘때론 외로움 속에서 마음이 편하기도 하잖아. 남은 2주 동안 그걸 더 즐겨봐.’
나직한 목소리와 잔잔한 웃음. 비록 아주 짧게 스치는 고객과의 대화지만, 그리고 매우 부족한 영어였지만 진심을 다해 나에게 질문하고 답해줬던 기사님.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그의 너털웃음. 본인은 푸켓에 사는 사람이지만 친구가 두명 밖에 없다는 위로. 참 오랜만에 소리내어 웃었다. 아무리 웃는 얼굴에 욕하는 사람이 많아도 나는 웃어야 한다는거.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웃는 것. 소리내어 웃고나서 마음이 내내 개운한걸 보니 무슨 일이 있어도 웃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을 똑바로 쳐다보고 웃어주면 정말 속에서부터 광채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겠나 싶은 밤.
더 이상 웃는걸로 고객의 민원을 받는 동료들이 없길 바라며,
모두가 더 이상 차갑고 날카롭게 서로의 웃음을 재단하지 않는 날이 오길 바라며.
또 다시 웃음의 힘을 믿어봅니다. 하하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