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도 스치고 현재도 스친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직장을 따라서 수도권과 서울 곳곳으로 이사를 많이 다녔다. 지금은 학창 시절과 사회생활의 고된 풍파 속에서 본래의 성격이 수없이 깎이고 다듬어져서 후천적 내향인이 되었지만 사춘기를 겪기 전의 나는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가까워지는 것에 거침이 없었다. 외동인 나에게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것은 일종의 게임처럼 재미를 획득하는 것이었고 친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즐겁고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대학입학을 기점으로 학교, 지역, 전공, 진로에 따라 많은 친구들이 멀어졌다. 멀어진 친구들의 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새롭게 만났지만 그 역시도 십 년, 이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먼지처럼 흩어지고 구심점 없는 개별의 인연들로 바뀌었다.
여전히 마음속 깊은 유대를 갖고 연락 횟수에 상관없이 닿으면 늘 따뜻한 기운으로 연결되는 사람들이 있음에 참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 가깝고 먼 관계들을 나의 인간관계의 뼈대로 인정하고 혼자 있는 시간들을 외롭지 않게 채워나가기까지 울기도 많이 울었고 아쉬움도 많이 느꼈다. 왜 멀어졌는지 그 연유를 알고 싶기도 했고, 여전히 그 의문이 풀리지 않아 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깊었던 인연이 한순간에 돌아서게 되었는지 때때로 되짚고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매끈한 끈처럼 이어 붙일 수 없는 걸 알기에 그냥 지금의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지,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생각하며 과거를 굳이 파헤치지 않는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더 먹어갈수록 지금 내가 존재하는 공간, 지금 나와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에 집중하게 되었다. 아마 뻗칠 에너지가 더 이상 많이 남아있지 않아 몸을 사리다 보니 더 그렇게 된 것 같다. 또한 이미 내가 가족을 꾸린 이상 버겁거나 잘 맞지 않는 사람들과 맞춰갈 이유도 못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신선하고 모험 같은 삶보다는 물 흐르듯 지금의 상황에 안전하게 부유하고 싶은 느낌이랄까.
얼마 전에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곤 무릎을 탁 쳤다.
우리는 언제나 살아갈 준비를 할 뿐,
정작 삶을 살지 않는다
-랠프 월도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사는데 정답이 어딨 어> 중에서
적토마같이 나라는 사람의 자아를 이곳저곳에 뿌리고만 다니다가는 현재를 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은 이후론 다행히도 시절인연들의 종결에 눈물짓지 않게 되었다. 홍콩에 와서도 내가 굳이 불나방처럼 팔딱거리지 않아도 나와 결이 잘 맞는 소수의 인연들이 생겼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나누고 그것이 참 위로가 된다. 나의 서른 중반을 엄마로서, 주부로써, 나로서 그 나이에 맞게 채워나갈 수 있도록 힘이 되는 좋은 언니들. 이젠 좋은 사람들을 만나면 과거처럼 빠르게 가까워지려고 애쓰지 않는다. 좋은 것들을 배로 나누고 삶을 긍정적으로 부벼보자는 목적이었지만, 함께 한 시간의 속도를 추월하여 서로의 삶에 황급히 끼어들고 싶어 했던 관계들의 끝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기억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받은 고마움을 충분히 표현하고 나와 타자를 가로 짓는 선을 충분히 지키면서도 따뜻함을 전할 수 있는걸 이젠 알기에 인연을 맺는데 무리하지 않는다.
적당한 속도로 친숙해지고 서서히 스며들고 과한 돈독함을 과시하지 않는 옹골찬 시절인연들이 있기에 더 이상 과거에 떠나보낸 인연들이 유령처럼 마음을 헤집지 않아서 행복하다. 이미 지나친 인연에 연연하지 않으니 삶이 보다 안정된 기분이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감정의 동요도 적고 무엇보다 현재를 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땐 누구랑 이거 했었는데, 이땐 이래서 좋았는데' 등의 아쉬움도 덜하다. 지금의 내 삶에 그만큼 충실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나를 소모하지 않는 몇몇의 소중한 관계들과 함께 오늘을 살고 있다.
구태의연한 말이지만 이토록 짧은 생에 굳이 싫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를 구비구비 펼쳐 보여줘야 하는 관계들이 내 자아를 풍요롭게 하진 않는 것 같다. 이 사람도 알고, 저 사람도 알고, 이 약속 저 약속에 불려 다니는 바쁜 삶이 과연 얼마나 나를 채워줄 수 있는지 내내 생각해 본다. 만남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몸이 버겁거나 마음이 허무하진 않은지.
무슨 연애프로를 보다가 어떤 출연자가 '언니가~ 언니가~' 하면서 그 무리의 왕언니처럼 행동을 하길래 나이를 보니 나와 나이가 같았다. 이젠 어디 가서 나도 어리다고는 절대 할 수 없는 나이라는 것이 약간 놀랍고 씁쓸했지만, 그동안의 세월이 나에게 인연을 맺고 다듬는 좋은 눈과 태도를 만들어주었다고 생각하니 헛된 시간들은 아니었다는 생각에 참 뿌듯했다. 좋게 무르익고 있는 느낌이 참 좋다. 짤끔짤끔 알아가는 중이지만 정말 오래갈 사람들과 연을 차분하게 잘 맺고 함께 나이 드는 느낌도 참 좋다.
나는 요즘 좋은 사람들과 무탈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답답하거나 지루하지 않고 너무도 감사합니다.
불혹의 내 모습이 참으로 기대되는 요즘이에요.
그때의 내가 더 무르익은 사람이길 바라며 오늘도 좋은 마음을 가꾸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