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에 답이 있다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순간의 감각이 있다. 이것은 내가 살아오면서 얻게 된 쓸만한 능력 중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동물적 감각이라 할 수 있는데, '이해'와 '진정한 깨달음'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아는 감각이다.
내가 이 능력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는 2년 전 쓴 글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어 그 글을 통째로 옮겨 적는다.
왼손의 쉴 틈 없는 아르페지오와 오른손의 화음 및 도약으로 테크닉 성장을 할 수 있는 곡.
연습량 대비 연주 효과가 돋보이는 곡.
강하고 화려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
여러 가지 매력적인 요소가 있었지만 이 곡을 발라드 다음의 레퍼토리로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는 '악보 보기가 쉬워서'였다. 1장을 보면 파 샵 하나밖에 없지, 왼손은 패턴 반복이라 왼손만 열심히 연습하면 의외로 쉬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언젠가는 쳐보고 싶었던 곡 중 하나이기도 했고.
지금 내가 이 곡을 소화할 수 있을까? 의문이 스쳤지만 2년 넘게 지도해주신 레슨 선생님이 내가 칠 수 있을 거 같으니 권유하신 게 아닐까 하는 묘한 근자감과 함께 계획했던 에튀드는 잠시 마음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곡의 첫인상대로 초견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은 과연 명성 높은 악마 조곡다웠다. 특히 손과 체구가 작아 풍부한 소리를 내기 어려운 나에게는 손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온몸에 땀은 범벅.
어느 날은 몸이 아파서 연습을 하기 두려울 정도였다.
10분짜리 대곡이었던 쇼팽 발라드를 치면서도 통증으로까지 이어진 적은 없었는데
특별히 릴랙스가 안되고 있는 걸까? 어디에 힘을 주고 있는 걸까. 완전히 잘못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몸이 고통스럽다고 말하니, 소리가 좋을 리가 없었고, 그대로 자신감 하락으로 이어졌다.
아무래도 학원을 그만 다녀야 할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일들 때문에 피아노를 잠시 중단할 뻔하기도 하고 실제로 여행 때문에 장기 홀딩을 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원장님한테도, 레슨 선생님한테도, 드랍하고 싶다고, 포기하고 싶다고 입에 달고 살았던 민폐 수강생이었는데, 그때마다 잡아주신 선생님들....
연주회 일주일 전, 이 곡의 무게에 짓눌려 휘청대던 찰나 나의 진지한 후원자이자 남자 친구 (지금은 남편이다)에게 조그만 지적을 받으니 쌓인 스트레스가 폭발했다.
- 나 이 곡 안 해, 안 할 거야. 연주회 안 나가!!!! 절대 안 나가!!!!
피아노를 앞에 두고 엉엉 소리 내 울었다.
그런데도 결국엔 무대에 올랐다.
타인에게 연주를 들려줄만한 단계가 결코 아님에도, 듣기 힘든 수준의 연주 상태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완곡을 했다.
철저히 나를 위해서 그랬다.
책임감 세포가 완벽주의 세포를 이긴 것이다.
삶을 사는 태도에 대한 통찰 한 가지.
피아노를 치면서 삶에 대한 통찰까지 하다니, 스스로도 놀랍다. 이 곡을 통해 얻었던 소중한 교훈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의지도, 세 번째 연주회를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는 성과도 아니었다.
어떤 사실, 조언, 생각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태도란 곧 마음의 여유. 내가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어떤 좋은 말이나 생각도 진심으로 체화되지 못한다. 한 마디로 귓등으로 듣고 마는 것이다. 연습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레슨 선생님이 이미 수십 번은 말했었을 개선점들을 나는 듣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히 듣고 있었지만, 듣지 못했었던 것. 박자 지키기, 천천히 치기, 어깨 내리고 치기. 이 모든 기본적인 사항들을 이미 나는 잘 알고 있었지만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지킬 수 없었던 것은 딱히 나의 잘못도, 전달자의 잘못도 아니고, 그저 내가 그것을 받아들일만한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나는 이미 계이름을 보느라, 미스터치의 중압감과 싸우느라, 포르테와 피아노를 신경 쓰느라 너무나 바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유를 가져야 할까.
답이 의외로 너무 쉽다.
천천히 치기이다. 그냥 단순하게 천천히 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놓치고 있는 모든 것들을 컨트롤하면서 천천히 치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저 억지로 느리게 쳤었다. 그런데 이제는 천천히 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였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마치 '물'의 진짜 개념을 이해하게 된 헬렌 켈러처럼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대하는 것은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주변을 들여다보아야 깨닫게 될 수 있다는 통찰을 얻었다.
사건을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나는 이 곡을 연주회 무대에 올리기 위해 약 4개월 가량을 씨름했었다. 아마도 레슨 첫날부터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었던 것 같다. 이 곡은 8분의 6박자 곡이고, 처음부터 여섯 잇단음표를 치긴 어려우니까 셋잇단 음표로 쪼개서 3박자 느낌으로 쳐야 한다고. 이 이야기를 레슨 하면서 셀 수도 없이 들었던 것도 같다. 나는 진심을 다해 귀여겨듣고 있었고 3박자로 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남자 친구, 그러니까 지금의 남편이 연주회를 일주일 남겨둔 시점에 내 리허설을 듣더니 6박자 곡을 왜 4박으로 치고 있냐는 게 아닌가.
그 날의 나는 나 자신에게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듣고 있던 것, 의식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진정한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런 척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니. 당시 나의 심정은 '물'의 진짜 의미를 깨우친 헬렌 켈러의 광명의 순간을 함께하는 듯한 찌릿함이었다.
최근 '진정한 깨달음'의 감각을 느낀 사건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과정의 즐거움'이라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삶의 태도다. 전 글에서 꿈을 정의해 보며 목적과 목표로 분류하는 글을 썼는데 이 또한 목표, 경쟁, 성과 지향적이었던 내가 '진정한 깨달음'을 얻고 삶의 터닝포인트를 만난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남편과 내가 직접 쓴 결혼서약서 제3행에서 약속한 말이다. 많은 이들 앞에서 맹세를 하였음에도 여행하듯 살고 싶다는 나의 언행은 대체로 불일치했다.
'결국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아무짝에도 소용없지 않은가.'
'남들보다 더 인정받고 싶어.'
'내가 한 노력들에 대해 더 특별하게 보상해 줬으면 좋겠어, 똑같이 대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carpe diem, seize the moment, 몰입, 현재를 살라는 말은 힘든 시간들을 버티게 해 준 오랜 나의 좌우명이었지만 바람과는 다르게 실제로 매 순간을 그렇게 살지 못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못난 자격지심들이 결국 삶의 지침으로 삼은 멋진 문장들의 반쪽만을 이해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지금 느끼는 이 감각은 '진정한 깨달음'의 영역 안에 들어와 있음을 마주한다. 계기는 있었지만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감화되었다. 현재를 살며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함께 걷고 싶은 믿음이 생겼다. 2016년도에 적은 일기장의 몰입과 지금의 몰입에는 질적 차이가 있다. 만약 2016년도에 진정으로 몰입의 중요성을 깨우쳤다면 습관이 되어 복리로 쌓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증명하는 길은 단 하나다. 이렇게 계속해서 기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