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의 덫
블로그와 브런치는 둘 다 글에 적합한 플랫폼이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온라인에 자신의 콘텐츠를 쌓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가볍게 취미로 시작했더라도 결국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검색되기 위해 알고리즘을 위한 글쓰기 스킬을 연마하게 된다. 문제는 정도의 차이다. 사용자가 많이 검색하는 키워드가 글의 주제가 되고, 키워드는 온라인에서 검색되기 위한 기본 수단임에는 동일하지만 키워드를 의식하지 않으며 글을 쓸 수 있다와 없다는 큰 차이가 있다.
한마디로 블로그는 상위 노출을 위한 ‘키워드’를 의식하지 않으며 글을 쓸 수 없다. 이게 어느 정도까지 좌우하냐면 주제를 선정하고 제목을 짓는 것뿐만 아니라 글쓰기 과정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맞다, 알고리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본문에서 사용하는 문장과 단어까지 로직이 좋아하는 단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다 한 두 가지의 단어를 잘 못 쓰게 되면 열심히 쓴 내 글은 바로 검색 누락행이다. ('지옥'이라는 단어를 삭제하니 다시 검색에 걸렸다는 이웃님 썰)
어디 단어뿐인가. 로직은 말투까지 결정한다. '~같아요', '~보여요', '~추천해요'는 광고처럼 보이니까 금기시되는 종결 어미이고 경험한 것처럼 '~했습니다', '~좋았네요' 체로 써야 한다. 심지어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사진이나 문장까지 필터링된다고 하니 어디서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루머인지 알 수조차 없다. 중복 이미지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이미지 숨김 처리나 메타데이터 수정은 이제 기본 사항이 되었고, 키워드는 본문에 딱 8~10개만, (그 이상을 초과하면 다른 비슷한 단어로 바꿔야 한다) 모바일에서는 발행하면 안 되고 정해진 시각에 일정하게 발행해서도 안되며, 상업성 키워드만 발행해서도 안된다. 자기 블로그 지수에 맞는 검색량을 가진 키워드를 골라서 써야 하고 제목에 자꾸 같은 키워드가 중복되면 열심히 키워온 블로그는 어느 날 하루아침에 해저 이만리로 떨어진다.
나는 마케팅 오픈카톡방에서 가끔 눈팅을 하곤 하는데 지금까지 그들 중 '고객을 위한 글쓰기 방법'에 대해 서로 질문하는 케이스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쓰면 로직이 좋아할까요?' '이런 식으로 쓰면 로직이 싫어하나요?' '문제없는 원고', '문제없는 이미지'가 중요하다 등등.
알고리즘을 정복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전장에 선 수많은 대행사는 블로그를 몇십 개씩 운영하며 키우고 죽이고를 반복하며 기계의 선택을 받기 위해 글쓰기 기계가 된다. 상위 노출 경쟁 블로그 글을 기계적 어뷰징을 통해 공격해서 죽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웃이나 팔로워 수를 기계로 늘리는 것은 뭐 이제는 기본 중에 기본이고. 로직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1그램만 알게 되더라도 먼저 비밀을 밝혀낸 자는 영웅이 되며 정보를 비싸게 팔 수 있고 상위 노출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상황이 전쟁터이다 보니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쓴다는 건 사치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상위 노출되는 글이 결국 방문자 수를 늘리기 때문에 내가 표현하려고 하는 문장, 단어보다는 알고리즘이 좋아하는 표현, 싫어하는 단어들을 고르고 키워드를 문장 사이사이에 적절히 배치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좋은 글이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아니라 알고리즘에게 선택받는 글이다. 선택받지 못하면 애초에 읽힐 기회가 없다.
분명한 장점도 있다. 소통을 통해 글에 대한 직접적인 피드백을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퇴사를 하고 글 쓰기를 막 제대로 시작할 무렵, 다시 말해 혼자 일기장처럼 쓰는 글이 아닌, 주제와 목적, 타깃을 가진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후 내가 선택한 플랫폼은 블로그였다. (티스토리, 유튜브, 브런치로 테스트를 해 보았다) 그리고 그 선택에는 후회가 없다. 글을 쓰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글쓰기에 충분한 자부심을 갖지 못하는 것처럼 나 또한 내가 잘 할 가능성이 있는지, 전혀 소질이 없는 수준인 건지 파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블로그 이웃 소통을 통한 사람 냄새나는 피드백들로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 경험은 분명 자기 효능감을 높여주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피드백에 함정에 빠져버린 나를 발견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아쉬웠고, 있으면 있는 대로 부담이 되는. 이 모순을 어쩌란 말인가!! 확실한 건 남을 위한 글쓰기 (정보성 글쓰기)에 지칠 대로 지쳐서 나를 위한 글쓰기를 시작한 순간부터 유입률과 피드백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래서 블로그에 글쓰기를 하고 싶은 사람은 선택을 해야 한다. 내가 쓰고 싶은 글과 남이 원하는 정보 사이에서 어떻게 절충해 나갈 것인지를 머릿속에 잘 그리면서 운영해야 한다.
숫자는 야박하다. 거기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대체로 소통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내 글에 대한 반응을 조회수나 좋아요, 공유 수 같은 숫자로밖에 유추해 볼 수가 없다. 글쓰기를 제대로 시작한 것은 올해 2월이지만 2018년도 말부터 시작한 블로그 경험 중에 네이버 메인에 2차례 올라 폭발적인 방문자 증가를 겪은 적이 있다. 또한 내 힘으로 단기간에 일 방문 4.000 이상 만들어 보기도 했고. 그러나 일련의 경험, 즉 숫자가 주는 희열은 결코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딱 그 정도 느낌.
그래서 지금 브런치에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것 같다. 조회수, 좋아요, 구독자 수, 공유 수는 낮지만 이 숫자가 높아진다고 해서 내가 특별히 기분이 좋아지거나 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남이 원하는 글, 남들이 원하는 정보성 글쓰기를 그만하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니 다시 글 쓰기가 재밌어졌다. 채널을 키우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콘텐츠와 남이 원하는 콘텐츠의 중간 접점을 잘 찾아서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데, 나는 브런치에서만큼은 그냥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싶다.
내 글의 파급력이 기대만큼 높지 않은 현 상황을 미루어봤을 때 내 글의 매력도는 평균 혹은 그 이하로 짐작된다. 서글프긴 하지만 별 수는 없다. 데이터가 내 의욕까지 꺾는 상황만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5년 후 나의 정체성에 '글 쓰는 사람'이 있는 이상, 계속해서 글을 쓸 것이다.
글에 대한 반응이 숫자이든, 사람이든, 그것이 많든 적든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정리하고 싶은 생각, 나누고 싶은 지식 등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삶을 살고 싶다. 당장은 고통스러운 글쓰기지만 이 모든 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원하는 나의 모습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통계를 보지 않게 되었다. 나에게 의미 있는 숫자란 내 글을 몇 명이 읽고 공유했는지가 아니라 내가 일주일에 몇 번이나, 하루에는 몇 시간이나 엉덩이 붙이고 앉아 글을 썼는지가 지금으로서는 더 의미 있다. 적어도 지금 시작단계에서는 그렇다. 지표 개선은 콘텐츠 생산이 나에게 당연한 일상적 일이 될 때까지 미루어두기로 한다. 이것이 내가 찾은 '지속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