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각
이 글은 퇴사 3개월 차에 블로그에 쓴 글을 반년 이상 지난 지금 시점에 퇴고해서 쓰는 글이다. 이 당시에 나는 퇴사와 퇴사자라는 말을 참 많이도 썼던 것 같다. 프리랜서도 아니고, 창업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블로그 강사가 된 것도 아니고, 애매한 나 스스로에게 붙였던 직함으로 '퇴사자'가 딱 적당했다. (지금 직함은 '프로 과정러')
(현재) 회사를 다니지 않는 사람.
(언젠가) 회사를 다닐 사람.
호기롭게 퇴사했지만 내 우주의 중력은 여전히 회사에 있었다. 한 달, 두 달, 세 달, 네 달까지 '퇴사자'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하다가 다섯 달이 접어들 무렵, 회사로부터 진정으로 조금씩 멀어져 갔던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입사와 퇴사의 중간쯤에 서성이며 미련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던 나는 9월 말 어느 날 가을 산책 길,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2주 전 어떤 진정한 깨달음의 영역을 스쳐 지났다. 그리고 정말로 회사와 작별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회사는 연인 관계란 말이지)
지금은 왜 그렇게 퇴사 직후 퇴사자, 퇴사를 이야기했는지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지만 소속감을 잃고 완전히 혼자가 되었을 때의 자유로움과 두려움을 주체하지 못해 우선 익숙한 과거의 세상을 끌어다 옆에 놓고 싶은 기분이었을테다.
이 글 다음으로는 퇴사가 필요한 이유가 있다.
회사를 다닐 때 장점
회사에서는 온갖 유형의 인간들(?)과 주 5일, 최소 9시간을 부대끼며 보내야 한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과 매일매일 밥을 함께 먹고 공동의 이익과 비전을 실현하는 집단이 바로 회사다.
느슨한 연대에서 맺는 관계와는 차원이 다르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 때도 있고 싫어도 좋은 소리, 하고 싶지 않아도 쓴소리를 해야 하는 곳이 바로 회사이기 때문이다. 내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관찰하고 조율하며 직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평가를 받는다. 여기서 받은 평가로 나의 존재감-능력-가치가 결정된다.
다시 말해 1퍼센트의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이상 99% 회사원은 협업/조율/문제 해결 능력으로 인사평가를 받는다. 이 과정에서 아무래도 맷집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는 회사 장면이 나오는 드라마를 볼 때마다 의문에 잠기곤 했다. 저 많은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느라 저렇게 바쁜 것일까? 자기 자리에 앉아서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 걸까? 회사생활을 8년 이상 겪은 지금도 그 생각은 종종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다른 팀은 무슨 일을 하느라 저렇게 바쁜 걸까? 다른 회사는 무슨 일로 바쁜 걸까? 일이 많이 있을까? 이 정도면 충분히 잘 나온 프로덕트인데 더 개선할 것들이 있을까?
그래도 연차가 쌓이다 보면 회사가 왜 그렇게 바쁘고, 어떤 일 때문에 프로젝트가 진행되지 못하고 일정이 딜레이 되며 어떤 잠재적인 리스크가 있는지, 업무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메타 인지가 높아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왜 진행이 안되는지, 어디서 막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회 초년생일 때는 회사가 돌아가는 게 잘 보이지 않는다. 정보의 불평등은 회사의 직급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차가 높을수록, 회사를 오래 다닐수록, 또 개인이 노력할수록 회사의 중요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알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로 인해 회사가 어떤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돌아가는지, 결정권자들이 어떤 결과를 원하는지 전체적인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다. 회사 안에 몸 담고 있다면 눈 앞의 일에만 몰입하기보다는 회사 전체가 어떤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는지 메타 인지를 넓히는 것이 좋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것이 나중에 회사 바깥에서 자기 일을 할 때도 힘이 되어 줄테니까.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충분한 회사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1인 기업, 프리랜서, 디지털노마드가 원하는 것은 규모 있는 회사를 키우는 게 아닌 개인의 시간과 경제적인 자유다. 따라서 이들이 개인 차원에서 아무리 큰돈을 벌어도 그 액수는 기업이 버는 것과는 스케일에서 차원이 다르다.
내가 혼자 하는 사업은 광고비 5만 원 쓰는 것에 손을 덜덜 떠는데 반해 회사에서는 공짜로 5억을 써볼 수 있다. 심지어 5억을 광고비로 쓴 후 성과 측정과 데이터를 산출 등 번거로운 작업들을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닌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알아서 척척 해 준다.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지만 협업을 통해 매머드를 잡고 달까지 갈 수 있었던 것처럼 기업은 시스템을 통해 최고의 효율을 추구한다. 효율적인 공짜 시스템을 이용해 업무 생산성을 높이며 우리 또한 기꺼이 시스템의 일부가 된다.
나의 경우는 비교적 아웃풋이 명확한 디자인 업무를 했기 때문에 혼자 하는 작업보다 피드백을 받아서 진행하는 작업의 결과물이 더 좋았다. (단, 합리적이고 근거가 충분한 피드백일 경우)
비단 작업물뿐만 아니라 서비스 기획, 콘텐츠 제작 등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객관화와 피드백이 반드시 필요하다. 자기 지식과 경험의 함정에 갇혀서 자기 객관화를 할 수 없다면 더 나은 쪽으로 발전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실력이 좋은 팀원, 팀장이 있는 회사는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가치가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건설적인 피드백을 한다면 나와 회사가 함께 성장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이상적인 회사는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도 사실이다. 또한 때로는 내부 피드백에 의해 좋은 의견이 사장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저 아이디어는 바로 시장의 평가를 받아보면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 이런 아쉬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한 둘이 하닌 건지, 요즘에는 중간관리자에 의한 피드백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어쨌든 회사에서는 좋으나 싫으나 피드백과 협업이 필수적이다. 좋은 소리도 듣고 싫은 소리도 들으면서 어떤 경우에는 서포트 역할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리더가 되어 조직 내 자신의 역할을 찾아 기여하는 연습을 돈을 받으면서 할 수 있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돈을 받으면서 일을 배우는 것)
프리랜서로 전향하게 된다면 개인사업자나 기업체를 상대로 일을 해야 하는데 갑을 잘 다루려면 갑의 입장도 경험해 보는 게 좋다. 갑의 입장에서 어떤 외주 회사를 선택하게 되는지, 어떤 부분에서 감동을 받는지, 어떤 태도가 마이너스인지 등을 알 수 있다. 갑을 경험해 보니 갑도 힘들다. 을도 힘들고. 일은 그냥 힘든 거야.
아마도 회사를 다니면 가장 큰 장점이 소속감 아닐까? 물론 이 놈의 소속감,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대부분의 퇴사 사유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느슨한 연대도 그만의 장점이 있지만 끈끈한 가족 같은(...) 연대도 우리가 인생에서 한 번쯤 해보면 좋을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소속감과 그로 인한 안정감, 신뢰, 일상을 나누는 즐거움은 인생에서 꽤나 소중한 것들이다. 인간의 본능 중 상위권에 있는 욕구도 소속의 욕구다.
전업 주식 투자자가 그렇게 외롭다고 한다. 자신의 목표를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없기 때문이다. 전업 투자자야말로 특공대, 각자도생이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디지털노마드나 1인 기업가를 하더라도 사회적 연대와 소속감을 유지해줄 결이 맞는 커뮤니티를 찾는 것도 정말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 보고 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
선택한 것에만 집중하자
최근에는 대학 졸업 후 회사 생활을 선택하지 않고 바로 창업을 하는 용기 있는 밀레니얼이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대학교 졸업장의 실효성조차 의문이 드는 판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환상, 미련은 어쩔 수 없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조직원으로서의 경험은 앞으로 회사를 이끌어나가거나 프리랜서 활동을 할 때 여러 인사이트를 제공해 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번 태어난 인생, 5년 이상의 회사 생활을 경험해 볼 것을 추천하고 싶다.
다음 글은 우리 인생에 퇴사가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