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일기
퇴사를 하고 4주 차. 만 3주의 시간이 흘렀다.
퇴사하고 한 달, 두 달 정신 차려보면 반년 그냥 지나있다고 하더니, 정말이다.
퇴사 직후 첫 일주일은 퇴사 전후의 심정과 방향성을 다듬는 글을 쓰는 데 몰입하는 시간을 가졌었고.
둘째 주는 해 보려고 했던 일들을 시도하는데 시간을 썼다. *2주 차의 가장 큰 성과는 유튜브 채널 개설과 영상 업로드였다.
그리고 셋째 주인 이번 주.
불안 장애가 폭발했다.
코로나 때문에 출근하지 않는 남편이 차려준 밥상을 받아먹기만 했을 때도,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도,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도 몰려드는 불안 증세를 쫒느라 현실 세계와 내면세계를 무던히도 왕복하였다.
설마설마했는데, 그놈의 불안 증세가 오고야 말다니.
4년 만인가....
나를 덮치는 불안증을 담담히 마주하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불면과 싸우다 이십 대 마지막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보았다.
2016년, 스물아홉을 넘겨 서른을 막 찍었을 무렵 나를 지배했던 감정은 '불안함'이었다. 이 시기 불안함의 원천은 '연애와 결혼' 카테고리에 속해있는 미래에 대한 막연함과 외로움이었다. 단순히 두렵고 불안하다는 감정을 넘어서 신체가 지배받는 것을 '불안장애'라고 말한다. 불안하다는 감정은 단순히 감정인 상태로 머무르지 않고 신체의 곳곳에서 그 존재감을 들이밀었다. 특히 정지된 상태를 벗어나 신체를 움직이려고 할 때면 어김없이 불안감이라는 화학물질이 온몸의 핏줄을 타고 돌아 나를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당시의 나는 정말이지 현재에 살지 못했던 불안 투성이 서른이었다. 밥을 먹을 때도 딴생각, 친구나 가족들을 만나도 딴생각, 회사에서도 딴생각. 당연히 밥도 맛없고 대화도 재미없고 일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이렇게 살다가는 내 삶이 뿌리가 뽑힌 수초처럼 방향을 잃은 물결에 휩쓸리다 결국 어디론가 떠내려갈 것만 같았다.
부유했던 삶을 어떻게든 뿌리내리고 싶었다. 이 시기에 내가 해결했던 불안 극복 방법은 '지식의 탐구와 독서'였다. 마침 인문학 열풍과 함께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대박 유행 중이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고민은 잠시 내버려 두고 눈을 바깥으로 돌리니 그제야 숨통이 터졌다. 출근길 팟캐스트를 통해 듣는 채사장의 개그 코드에 깔깔대고 네 명 패널의 입담과 케미를 동경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연애 칼럼 대신 FRB 음모론 이야기, 여우 같은 여자가 되어 남자 꼬시기 칼럼 대신 세균과 바이러스의 역사, 오늘 헤어졌어요 글 대신 니체 사상으로 내면의 적막을 채워갔다. 내가 이렇게 지적 탐구에 목이 마른 사람이었나? 새로운 나를 발견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취향의 발견 후 서울대 출신의 남편과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문제가 해결되니 불안증은 가셨고 직장도 연애도 안정된 행복했던 4년여의 시간이 흘러 지금.
퇴사 후 내가 마주한 현실은 무한 경쟁에 내 놓인 발가벗겨진 나였다. 회사의 익숙함, 경력, 소속이 주는 방어 도구 없이 나를 홍보하고 팔아야 했으며 그에 대한 결과는 나의 생계에 즉각적인 영향을 준다. 모든 것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주체적인 삶을 꿈꾸면서 퇴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생존 경쟁에 내던져지자 이루 말할 수 없이 두려움에 휩싸였다.
몇 번의 경쟁에서 승리를 거두더라도 어느 날 지쳐 쓰러진 내가 결국 주저앉으며 내 그릇의 크기와 모양의 한계를 인정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하는 두려움이 불안을 가져다주는 주요 원인이었다. 더 이상 꿈을 꾸지 못 하는 삶이라면, 내 미래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낙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20대는 가능성의 씨앗을 엿보는 시기이고
30대는 골라낸 씨앗들을 땅에 뿌리며 키우는 시기라면
40대에는 30대에 뿌린 씨앗의 성취를 기반으로 재능을 기꺼이 나누는 삶을 살고 싶은데.
실패를 통해 나의 한계를 결정지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함.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을 해보면 된다는 '희망' 속에서 살 수 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 걸 그랬나... (하는 멍청한 생각)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과거와 지금의 불안증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내가 선택한 결과에서 기인한 것이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한 책임이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면 불안증이 조금은 가신다. 불안이 나를 잠식해도 내가 불안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이다.
내가 바라보는 불안감은 버텨내야 하는 내 인생의 무게이다. 생각해보면 내 삶을 돌아봤을 때 남들보다 되게 고생하고 되게 열심히 하고 되게 노력한 것 같은데, 사실 그 정도로 고생하고 열심히 하고 노력했던 것은 아니다. 10년 지기 친구가 너처럼 직장 생활 편하게 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더 위안이 된다. 내가 전력투구하고 노력했던 일에 대한 결과가 지금이라면 여기서 더 해볼 수 있는 노력과 재능이 아주 조금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이 더 받아들이기 힘들 테니까.
-힘들어? 아니야, 너 정도면 노력한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조금 더 해봐.
-이 정도는 남들 다 하는 거야.
-지금은 그냥 버텨내는 것이 최선이야, 잘하고 있어.
나를 한계의 극한까지 내모는 것은 아니다. 그래, 나 좀 더 해볼 수 있지. 징징대지 말자, 이건 남들 하는 거 반의 반도 아니야라는 생각이 컴퓨터를 켜게 하고, 책을 집어 들게 하고, 노트를 펼치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내가 추천하는 불안장애 극복법 정리
1. 불안장애는 일어나지 않는 미래에 대한 과도한 걱정 때문에 생긴다. 때문에 현재에 주의 초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림 그리기나 요리하기, 퍼즐 맞추기, 색칠하기, 손뜨개 등 손으로 뭔가 꼼지락거릴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해보기!
2. 목욕을 좋아한다면 따뜻한 물에 몸담구고 멍 때리기 + 물 마시기
3. 예전에 갔던 여행 사진들 보기. 즐거웠던 기억들이 퐁퐁 솟아나면서 에너제틱! 여행 또 가려면 돈 열심히 벌어야지!
4. 일기 쓰기. 자신에게 편지 쓰기. 글 쓰기. 모든 쓰는 행위.
5. 내가 한 일에 대한 성과보다 내가 매일 한 일 자체에 집중하기. 조급해지지 말기
6. 매일 아침 나의 다짐 낭독하기
7. 아침에 일어나면 심호흡하며 방 안을 2분 정도 걷기
불안장애를 겪고 있는 이번 주에도 나는 상당한 아웃풋을 달성했다. 매우 칭찬해!
다음 주는 지금의 일상에 조금 더 적응하고, 담담하고 강한 나를 맞이할 거라 믿는다.
1. 멈춰있었던 블로그의 성장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고 있다!
2. 강의 계획서를 완성하고 투고했다!
3. 유튜브 첫 영상은 실패했지만 유튜브 알고리즘에 대한 인사이트가 생겼다!
4. 무엇보다도 온라인 플랫폼에서 나를 드러내는 일에 두려움이 증맬루 많이 해소되었다는 점이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5. 이번 주에도 브런치에 글을 썼다. 난 언제쯤 내 속에 있는 것들을 자유자재로 풀어놓을 수 있을까? 5년 바라보고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