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전시 vs 스타트업 vs 프리랜서 디자이너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나의 직업 실험기 1탄에 이은 2탄입니다.
2탄이 너무 늦었지요.... (숙연) 2탄을 쓰는 지금, 가족이 갑자기 둘이나 늘었습니다. 네에... 저는 쌍둥이 육아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 글도 조각 모음 하여 쓰고 겨우 발행하네요. 하하하하
1탄 : 지금까지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하였나.
2탄 : 디자이너 커리어 - 에이전시
3탄 : 디자이너 커리어 - 프리랜서
4탄 : 디자이너 커리어 - 스타트업 (4탄은 이미 썼다!)
안녕하세요 하기로님.
요즘 트렌드가 어떤지는 잘 모르겠네요.
라떼는 신입은 무조건 에이전시에 들어가서 내공을 쌓은 후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의 인하우스로 이직하거나, 에이전시가 잘 맞으면 그대로 쭉 에이전시에 있는 것이 베이직 루트였어요. 2000년대 중반에는 스타트업이라는 선택지가 거의 없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대학생 때 쓸데없는 활동을 너무 많이 했어요. 대기업 가고 싶어서 목적 없는 스펙 쌓기를 많이 했는데, 그 시간들이 너무 아까워요. 토익 스피킹이라던지 취업 캠프라던지는 왜 했는지 정말 모르겠네요. 그 시간에 포트폴리오나 더 잘 만들걸.ㅎㅎ
저는 컴퓨터 관련 자격증까지는 안 땄지만 포토샵 자격증 이런 것이 이력서에 있으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었지, 플러스 요소는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무엇이 중요한지 잘 모르는 사람처럼 보이거든요. 추가로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저는 성실성 하나로 우수 학점으로 졸업을 했는데요. (자랑입니다. gpa 4.3을 받았었죠.) 뜬금없이 학점 이야기를 왜 하냐... 학점(+학벌)은 하나도 안 중요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했습니다. 그냥, 아 그랬구나.. 성실하구나.. 딱 이 느낌 외에 아무 특별함도 없어요. (저의 개인적 의견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학생 시절에는 '이름 있는 회사=부모님이 아는 회사'에 들어가고 싶은 열망이 컸어요. 그런데 결론적으로 잘 안 됐고. 그렇다고 에이전시가 두 팔 벌려 나를 환영했냐, 전혀 아니죠. 에이전시에도 급(레벨)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규모에 따라 소형, 중형, 대형 에이전시로 나뉘어요. 에이전시의 레벨에 따라 프로젝트의 규모가 정해지고 클라이언트가 정해집니다. 소형은 소기업이 대상이 되고 중형은 중견 기업, 대형은 대기업. 매출액도 그래요, 소형은 프로젝트 단가가 1000 미만, 중견은 1억 미만, 대형은 1억 이상. 보통은 이런 식으로 책정이 됩니다. 여기에 플러스알파가 되는 요소로 에이전시의 브랜딩 파워가 있겠죠. 글로벌 디자인 어워드에서 상을 받았다던지, 네이버 카카오 출신이 나와서 차린 회사라던지, ceo의 퍼스널 브랜딩이 잘 되었다던지 등등이오.
어쨌든 저의 첫 커리어는 4-5인 규모의 작은 ppt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게 제 진짜 실력이었겠지. 소규모 회사였지만 강남에 있었고 사무실이 너무 넓고 쾌적했어요. 여기서 일 하면 디자인할 맛 좀 나겠네 싶은 사무실 분위기였답니다. 어렸을 땐 그런 외적인 것에 끌릴 수밖에 없었던 거 같아요. :) 한편으로는 사업 영역의 특수성이 있다 보니 소규모 회사였음에도 불구하고 클라이언트는 전부 대기업, 공기업이었어요. 소기업에서는 몇 백 ~ 몇 천만 원 주고 ppt 디자인까지 하지는 않거든요. 이 당시 건당 단가는 2~3일 내로 끝나는 아주 작은 프로젝트를 제외하고 대체로 천 단위였네요. 그렇지만 남는 건 거의 없었어요.
남는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거예요.
첫째, 돈이 남는다.
둘째, 시간이 남는다.
셋째, 경험이 남는다.
물론 제가 모든 에이전시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에이전시 특성상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안 남아요. 세 번째는 확실히 남고요. 그래서 1-3년 차 열정과 체력이 가장 높은 시기에는 에이전시를 다녀라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보통은 도제식 (사수-제자의 관계)으로 운영이 되고 디자이너끼리 경쟁하는 게 일상이라 실력이 확 늘 수밖에 없는 환경이거든요. 이런 분위기, 문화 때문에 자기 시간을 희생해서 (갈아 넣어서) 작업을 해야 하고, 시간을 갈아 넣었으니 이윤도 당연히 적게 남겠죠. 일 하는 시간 대비 월급을 계산하면 최저 시급도 안 나오는 게 되는. 회사 입장에서도 야근 전기세, 식대, 택시비, 클라이언트의 성향, 프로젝트 기간과 예산 조절 실패 등 여러 변수가 리스크로 적재되고요.
에이전시가 힘든 가장 큰 이유는 부가가치가 낮다는 것인데 관련 글도 있느니 관심 있다면 읽어주세요 :) 딱히 에이전시라서 박봉에 시달리기보다 per (Price Earning Ratio : 미래 가치가 낮게 평가된) 이 낮은 기업들이 다소 힘든 기업 문화 속에서 일을 하는 것 같아요.
시간을 갈아 넣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쓰긴 했지만, 확실히 투자하면 투자할수록 결과물이 좋게 나오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저도 어느 시점부터는 시간에 디자인 퀄리티를 맞추는 게 습관이 되었는데, 한 번만 더 욕심 내서 해 보자 이렇게 마음 다 잡고 붙들고 있으면 그 전보다 확실히 좋은 결과물이 나오긴 하더라고요.
에이전시를 다니면 '한 번만'이 아니라 '언제나' 나의 최선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게 돼요. 다들 그러고 앉아있느니 나도 모르게 장인 정신이 발동한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메이저 에이전시 웹사이트 들어가 보면 지금도 깜짝깜짝 놀라요. 디자인 퀄리티가 넘사벽이니까요! 스타트업이나 인하우스 디자이너가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디테일과 장인 정신이 녹여진 예술 작품들이 즐비하죠. 이들이 트렌드를 이끌고 전파합니다. 디자인에 대한 열정과 감각이 기반하지 않으면 절대 무리예요. 시장과 고객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 때문에 빠른 실행을 위한 인하우스 디자이너의 중요성이 대두되었지만, 역시 전통적인 전문가 집단에서 나오는 기획 - 디자인 - 개발의 아웃풋을 따라잡기 쉽지 않아요. 그래서 다들 '에이전시 출신을 우대' 하는 거랍니다. 그들은 확실한 스페셜리스트거든요.
에어전시만의 특징이자 또 다른 장점이죠. 내가 디자인을 하면 선임 디자이너가 디자인에 관련된 조언을 해 줘요. 레이아웃, 타이포그래피, 정렬, 이미지 등등. 스타트업에서는 디자인과 관련된 조언은 거의 들을 수가 없어요. 디자이너가 1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디자인이 되었네? 정도로 만족하는 거죠.
제가 만나본 선임 디자이너는 크게 세 타입이었어요.
1. 아무 말 없이 본인이 직접 다시 한다. (자기 자리에서 고치고, 결과물을 확인시켜 주는 유형) 특징 : 말 없음
2. 나와봐- 하면서 고쳐준다. (미대 입시 시절 생각남) 특징 : 말 많음
3. 자신의 자리로 부른 후 시안을 직접 수정하면서 설명한다. 특징 : 부장님
저의 경우 운이 좋게도 모두 좋은 사수들이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는 왜 내 것을 고치지, 뭐 저런 자잘스러운 것을 신경 쓰지 등등 거부감과 불쾌함이 들다가 며칠, 몇 주가 지나고 다시 봤을 때 이래서 고쳐주셨구나 하는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그 경험들이 저에게 디테일력을 쌓게 한 아주 좋은 베이스가 되어 주었어요. 이전 글에서 사람마다 보는 눈의 레벨이 다르다는 이야기를 했을 거예요. 요런 식으로 차곡차곡 남의 눈을 빌려옴으로써 업그레이드가 됩니다. 그래서 다들 사수~ 사수~ 하나 봐요. 역시 디자인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면 에이전시를 갈 수밖에 없어!!
지금까지 디자인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적을 꼽으라면 단연코 이 에피소드를 들겠어요. 32시간 일하기.
첫 회사였어요. 그날은 업무가 많아 8시간 빡세게 일을 했죠. 그래도 대충 여기까지 마무리하고 내일 마저 하면 되겠다 싶어 퇴근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때 딱 전화가 오는 거지. 자기들은 이러이러한 사람들인데, 제안서를 제출해야 해서 너무 급하게 부탁하는 건 알지만, 내일 오전 5시까지 되는 만큼 해 줄 수 없냐고. (미라클 모닝)
짜증이 확 밀려왔지만 밥 먹고 바로 작업에 착수합니다. 그때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했거든요. 와중에 운영만 하던 영업 실장은 구두 소리 또각또각 내며 수고해~ 하면서 퇴근. 그때 얼마나 분하던지. 그래도 어쨌든 5시까지만 하면 집에 가서 하루 종일 쉴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었죠.
근데 이 색히들이 거짓말을 한 거지.
1차 산출물은 그날 오전 10시에 넘겨졌고 아침에 출근한 실장은 찜질방이라도 다녀오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다시 회사로 복귀하란 뜻. 찜질방에서 씻고 정신을 잃다시피 쉬니 콜이 오고... 결국 그날 저녁 8시까지 일을 했던 거 같네요. 사실 기억이 안 나요 그 후 좀비 상태는...ㅋㅋ
에이전시는 보통 경쟁 PT를 통해 일을 수주하곤 하는데요. (요즘도 그러겠죠? 혹시 아니라면 댓글 부탁합니다) 시안 a, b, c를 각각의 디자이너가 잡고 클라이언트가 택 1을 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그렇다 보니 경쟁 pt를 경쟁이라 생각하지 않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 같아요. 시안을 잡을 때는 같은 컨셉으로 잡지 않고 서로 다른 컨셉으로 잡게 되는데,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온 시안을 보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었거든요.
다만 이런 건 너무 싫었어요. 내 디자인과 b 시안을 적절히 섞어서 c 타입으로 만들어 버리는. 중소형 에이전시에서 종종 그런 일이 벌어졌는데 그때는 너무 열이 받기도 했고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이 들어 금방 그만두게 되더라고요.
아무튼 경쟁 pt가 당연했기에, 스타트업에서 시안을 하나만 만든다는 게 또 적응하기 어렵더라고요. 다른 컨셉의 시안 두 개를 만들어서 더 좋은 방향성을 검토해 보자는 제안에 바로 다른 디자이너가 반박을 하더군요. 왜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진행해야 하냐며. 아마 사람의 기질적인 면도 있을 거예요. 저는 어릴 때부터 경쟁하는 걸 즐겼거든요. (운동회 광)
확실히 스타트업에서 지내보니 경쟁 pt는 에이전시 고유의 문화에 더 적합한 것 같아요. 대신 스타트업에서는 A/B 테스트를 하니까 경쟁 pt 와는 목적과 방향이 전혀 다른 것 같네요. 여하튼 경쟁에 취약한 타입이라면 에이전시 생태계는 상당히 빡셀 수 있어요. 옆자리 디자이너와 경쟁하면서 웃고 밥 먹고 해야 하거든. 표면적으로는 다들 좋게 지내지만, 경쟁심이 너무 심하거나 예민한 타입과 마찰이 종종 있기도 합니다. 중요한 건 디자인 작업물과 자신은 좀 떼어놓고 생각해야 해요. 작업물이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경쟁에서 졌을 때 마치 루저가 된 기분이 들 테니까요. 잠깐 우울할 수 있지만 그때뿐이에요. 또 다음 작업 재밌게 하면 돼요.
결론이지만, 다시는 에이전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요. 사람들이 예민한 건 확실히 힘들어요. 1px에 자존심을 거는 분위기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어요. 스티브 잡스가 그런 사람이었을까요... 너무 대단해요, 그렇지만 저랑은 좀 안 맞는 거 같아요.
저의 직업 실험기는 순전히 제 경험담, 썰풀이, 재미로 쓰는 글이었지만 - 그래도 스타트업, 에이전시, 인하우스 디자인 생태계에 대해 궁금한 주니어 레벨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둘 다 경험해 보길 추천해요. 가능하면 에이전시 먼저 :) 참... 스타트업과 에이전시는 선호하는 포트폴리오 스타일이 달라요. 그 글은 또 (언젠가) 조각 모음 해서 써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