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나 안 먹어." 파티션 너머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은행에서 나눠준 여행용 물티슈를 꺼내서 책상 위 먼지를 닦으려던 참이었다. 물티슈 겉포장 비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선배에겐 과자 소리로 들렸나 보다. 눈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무언가에 집중하는 선배는 내가 먹을걸 권하는 줄 착각했던 거다. 주지도 않은 과자를 거절당한 나는 선배를 보았다. "네??"라고 여쭤보자마자 선배는 눈을 돌려 내 손에 들린 물티슈를 보고 밀려오는 깨달음과 민망함에 웃었다. "물티슈구나.." 퇴근 후에 집에서 샤워를 하는데 물티슈를 먹지 않는다는 선배의 말이 다시금 생각났다. 언젠가 "이거 드세요 선배님." 하면서 물티슈를 건네는 상상도 했다.
"아니요 안 먹어요!"라는 말은 자취하는 나에게온갖 반찬과 먹을거리를싸주시던 엄마에게 늘 하던 말이다. 부모의 호의를 한사코 거절하는 불효자임을 커밍아웃하려는 게 아니다. 포인트는 백치미를 느낄 수 있었던 선배의 '안 먹겠다는' 말이다. 문득내가 선배에게 가족처럼 편한 존재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럴리는 없다. 아무리 가족 같은 회사여도 가족은 아니지 않은가. 희한하게도 선배가 내 호의를 단 한마디에 거절했는데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이 사람은 나와 친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서 만난 사이끼리는 어쩐지 거절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거절을 하더라도 괜찮으니 고맙다는 등의 쿠션어를 붙이는 게 보통이다. 띠동갑도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선배와 나노 인맥을 자랑하는 내가 어떻게 친해졌는지 새삼 돌아보았다.
사소한 관심이 세상을 구한다
학교와 회사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증가하던 지인의 수가 더 이상 늘지 않는 때가 온다. 인구수 자연감소가 시작된 원년이라는 2020년처럼 고점을 지나면 감소세로 돌아선다. 연락하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사라진다. 학교를 졸업하면 뿔뿔이 흩어진다. 직장 동기도 1~2년이 지나면 소원해진다. 동네 친구는 이사를 가면 멀어진다. 많은 사람 중에 고르고 골라 겨우 친해진 사람도 결혼하고 애를 낳으면 예전처럼 만날 시간을 내기 어렵다. 일 년에 새로 알게 되는 사람보다 줄어드는 사람 수가 더 많다면 위험 신호다. 이대로 가다가는 인맥이 지방도시처럼 소멸해버리고 만다. 어떻게 친한 사람을 새로이 만날 수 있을까?
처음부터 친한 사이인 사람은 없다. 행사가 끝나고 회사 버스 맨 뒷칸에 짐짝처럼 실려가던 신입사원 시절에 선배와 처음 이야기를 나눴다. 무릎을 붙여 앉아도 성인 남자들이 나란히 앉기엔 너무 좁았다. 문득 내 오른쪽 다리와 맞닿은 선배 청바지의 노란색 스티치가 눈에 들어왔다. 마침 고무줄 체중으로 맞는 청바지가 없었던 때라 관심이 가기도 하고 톤 다운된 바지 색깔이 마음에 들었다. 대뜸 청바지 스티치가 멋있다며 비싸 보인다고 선배에게 말했다. 깜짝 놀란 선배는 극구 부인하면서도 기분 좋아했다. 회사 내에서 최고로 말 없기로 유명했던 나로서는 당시 멘트는 진심 51%, 바로 옆에 앉았기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던 의무감 49%였다.
사소한 관심은 소소하게 돌아온다. 진심을 1g만 더 얹어도 상대방은 전자저울처럼 가식인지 진짜 관심인지 미묘하게 알아차린다. 선배의 청바지 스티치를 칭찬한 뒤로 선배는 나의 칭찬에 연이자를 1% 정도 붙여서 조금씩 돌려주었다. 언제는 일을 열심히 한다며 또 언제는 외투 디자인이 멋지다며 칭찬해주었다. 알고 보니 선배는 주변 사람을 칭찬하는 방법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프로 칭찬러였다. 지금도 가만히 지켜보면 그냥 하는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니다. 나름대로 상대에게서 칭찬할 점을 찾고 띄워주는 기분을 본인이 즐기는 듯하다.
사람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에게 마음이 기울게 되어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려면 무게 중심을 굳건히 지키고 자신을 지키려는 자세에서 조금 힘을 빼야 한다. 팔짱 낀 손도 풀어야 한다. 살짝 몸을 기울여 앞사람에게 관심을 가져보자. 칭찬할 마음이 들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진심은 연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 한 머리가 잘 어울린다든지 오늘 입은 옷이 멋지다든지 말을 예쁘게 한다든지 하는 생각이 든다면 표현해보자. 나 혼자 고립된 세상을 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서야 한다. 사소한 관심이 세상을 구한다.
충돌 없이는 서로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술보다는 음주를 하며 겪어야 하는 상황이 싫다. 집에서는 맥주 한 캔도 버겁지만 회사 사람과 술을 마시면 빈 속에 소맥을 두 잔, 세 잔도 마신다. 그 뒤로는 잔을 세지 않는다. 주량을 맞추며 어울리려면 어쩔 수 없다. 주량과 취기까지 남한테 맞추려면 꽤나 시간이 걸린다. 이쯤이면 집에서 고양이 밥을 주며 쉴 시간인데도 회사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한다. 노래방 시간 채우듯이 정해진 주량을 채워야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니 정말 이상하다. 여우네 집에 초대받아 넓적한 접시에 담긴 음식을 부리로 쪼는 두루미가 된다.
가장 선호하는 사교 방식은 그저 커피나 한 잔 하면서 나누는 대화다. 문제는 술 없이 간단한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다가 헤어지는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이 흔치 않다는 거다. 선배도 마찬가지다. 점심에는 몰라도 저녁을 커피로 마무리하면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남에게 맞추려고 넓적 접시를 부리로 콕콕 쪼다가 입술이 아려오면 어쩐지 분한 마음이 든다. 집 1층 공용현관을 열고 가까스로 들어간다. 영화 신세계에 나오는 정청처럼 엘리베이터 안에서 몸을 못 가눈다. 오피스텔 경비 아저씨와 눈이 마주치며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인생을 즐기고 귀가하는 젊음을 부러워하는 눈빛 같다. 속에서 더욱 열불이 난다. '하나도 안 좋거든요?!'
말하자면 물물 교환이다. 저녁 시간을 술이라는 재화로 교환한다. 커피, 과자, 유튜브, 고양이, 아늑함을 술과 맞바꿔서 타인과 어울리고 친분을 쌓는다. 대신 한 번쯤은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건 사실 이런 거’란 걸 보여줘야 한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케이크나 쿠키도 곁들여본다. 희한하게도 술은 좋아하면서 커피는 카페인 때문에 싫고 디저트는 살이 쪄서 싫다는 사람이 있다. 술을 마셔도 살은 찌고 심지어 성분은 알코올인데 말이다. 남과 어울리려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식을 먹는 기분을 느껴봐야 한다. ‘네가 좋아하는 건 커피인데 우리와 어울리려고 술을 마시려 노력했구나’라고 알아준다면 성공이다.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 나면 그 후로는 진심을 내비쳐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가 된다. 서로 좋아하는 게 다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억지로 권하지 않는다. 여전히 선배는 커피에 케이크를 먹지 않는다. 나도 여태까지 술을 즐기지 않는다. 술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갑자기 선배가 “술 먹을래?” 하고 번개를 치면 “아니요?” 하고 당당하게 말한다. 두 번에 한 번, 세 번에 한 번 이런 식으로 거절해도 노여워하지 않는다. 속 마음을 말해도 미움받지 않는다. 때로는 술을 먹자고 불러주는 게 관심처럼 느껴져서 고마울 때도 있다. 그때도 내키지 않으면 조금 망설이다가 “아니요?”라고 칼 같이 거절한다. 때로는 함께 어울리며 술을 마신다. 그런 날도 있어야 한다.
좀처럼 친한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다. 친한 사람을 만나기 힘드니 알아서 만들어야 한다. 사람을 사귀려면 잘 생기고 예뻐야 할까? 돈이 많아야 할까? 시간이 많아야 할까? 모두 정답이 될 수 있다. 그보다 중요한 건 타인을 궁금해하는 마음이다. 다른 사람의 세계에 발을 들이려는 큰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타인과 친해진다는 건 일방적으로 나를 희생하는 게 아니다. 원래 내 생활을 포기하고 상대에게 맞추지 않아도 된다. 정말 친한 사이는 물티슈를 먹지 않겠다고 보지도 않고 말할 수 있는 편안한 사이다. 거절당해도 물티슈로 책상 먼지를 슥슥 닦으며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오히려 좋은 사이가 건강한 관계다. 선배님, 다음엔 한 장만 드셔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