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벌고 먹고 살려는 삶의 의지는 마라톤만큼이나 감동적이다
‘주말 아침잠을 포기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야….’ 여의도로 향하는 새벽 지하철을 타본 사람은 금방 깨닫는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본인처럼 정상이 아닌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난다는 사실을.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주말 아침에 볼 수 있는 낯선 풍경이다. 여의도공원, 월드컵경기장, 여의나루, 잠실경기장으로 사람들이 모인다. 되려 출근시간보다 일찍 집을 나서야 하는데도 우울한 표정을 지은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코로나 19 유행 전엔 주말마다 볼 수 있었던 광경이다. 주말 새벽 지하철에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만의 시간이 흐른다.
보통 취미로 달리는 일반인은 10km 코스를 많이 신청한다. 초보자는 ‘사람이 어떻게 1km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나’ 걱정한다. 그런 사람도 조금만 연습하면 5km, 10km는 충분히 완주할 수 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핑계로 2년째 운동을 쉬고 있는 지금은 솔직히 5km를 달리라고 해도 완주할 자신이 없다. 5km는 고사하고 몇백 미터를 쉬지 않고 달리기도 힘들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강제로 역까지 뛰어야 한다. 예전엔 결승점을 남겨두고 막판 스퍼트를 했다. 지금은 지하철역에 다 와서 터벅터벅 걸으며 포기한다. 동시에 생각한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긴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릴 수 있지?’
고작 400m다. 집 앞 횡단보도를 하나 건넌 다음부터 지하철역까지의 직선거리다. 한창 달리기를 연습할 때 거리에 비하면 반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짧은 거리다. 어째서 이 정도 거리를 뛰는 데에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걸까? 운동화가 아닌 구두를 신고 있기 때문일까. 출근복에 거추장스럽게 가방까지 메고 있어서일까. 늘어난 몸무게만큼이나 출근하는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서일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지하철 시간만은 놓치고 싶지 않다. 쌓인 눈이 꽁꽁 얼어붙어 미끄러운 길 위를 달린다. 고무창이 맨들하게 닳은 구두를 신고 삐끗 미끄러지면서도 어떻게든 달린다. 나름의 간절함은 단거리 마라톤 대회 출전 선수에 꿇리지 않는다.
달리기는 알면 알수록 무척이나 자상한 운동이다. 끝까지 완주하는 게 중요하지 순위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골인점을 통과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반짝이는 완주 메달을 준다. 대회에 따라서 메달을 직접 목에 걸어주기도 한다. 살면서 메달을 목에 걸어볼 일이 얼마나 있을까? 금‧은‧동이 아니어도 괜찮다. 달리는 사람의 행복은 선착순이 아니다. 물론 대회 내내 ‘한 사람만, 한 사람만 더 제치고 싶다’며 동기부여를 하는 사람도 있다. 결과를 놓고 보면 빠른 속도보다는 페이스 유지가 더 중요하다. 마라톤 대회에서 빠질 수 없는 응원은 완주에 큰 도움이 된다. 지칠법하면 옆에서 소리치며 격려해주니 늘어진 페이스를 다시 끌어올릴 수 있다.
주로에는 물과 음료는 기본이요, 대학교 응원단의 환호와 드럼과 퍼커션으로 무장한 없는 힘까지 내도록 기운을 북돋워준다. 골인점에는 참가자들의 지인들이 사진 찍을 준비를 하고 있다. 생전 모르는 사람에게도 힘내라며 소리쳐준다. 메달도 그냥 주지 않는다. 대여섯 명의 스태프들이 하이파이브를 해주며 목에 걸어준 적도 있다. 완주 후 그 자리에서 흡입하듯 먹는 빵과 초코파이, 음료수는 당 충전 그 자체다. 달콤한 보상이다. 생각할수록 마라톤의 축제 분위기가 그립다. 응원을 받으며 달리는 기분은 이렇게나 즐겁다. 완주 기록이 조금 늘어나면 아쉽기야 하겠지만 괜찮다. 반면에 출근은 성적 부진이 용납되지 않는 프로 스포츠의 영역이다.
마귀 마(魔)라는 글자는 '극복해 내기 어려운 장벽'을 뜻한다. 10km 달리기를 하던 시절에는 45분이 마의 벽이었다. 지금은 55분이 한계다. 완주 시간이 전보다 10분이 늘어났다는 뜻이 아니다. 근무시간이 ‘9 to 6’인데 출근시간이 8시 55분이다. 9시 전에만 로비를 통과하면 세이프라고 애써 침착해보려 하지만 무리다. 나만 빼고 일찌감치 차분하게 자리에 앉아있는 사무실에 얼굴을 비추기는 항상 눈치가 보인다. 딱 1분만 앞당긴 54분 출근을 목표로 하지만 쉽지 않다. 업무 시작 5분 전에 가시방석에 앉는 기분이다. 출근이 이렇게 어려운 스포츠였나!
여의도에서 출발해서 강 건너 마포에 갔다가 돌아오는 대회에 나간 적이 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빛나는 한강 풍경이 완주 메달보다 소중했다. 한편으로 출근길 아스팔트 위를 덮은 얼음이 반짝이며 빛나는 풍경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답다. 경기에 임하는 치열함 또한 부족하지 않다. 러시아워의 지하철역에는 단정하게 차려입은 수많은 선수들이 절실한 마음으로 주로를 달린다. 석촌역 8‧9호선 환승구간은 코너링이 난코스다. 잠실역 2‧8호선 환승구간은 넓고 긴 주로가 특징이다. 안타깝게도 ‘출근 마라톤’은 완주 자체보다는 기록이 목숨처럼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다소 난폭하게 달리는 사람들도 많다. 선수 간 어깨 충돌이 그리 드문일은 아니다.
어째서 이토록 절박한 달리기 대회에는 응원해주는 사람이 없을까? 달리기의 즐거움, 도전정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다. 다만, 돈 벌고 먹고 살려는 삶의 의지 역시 마라톤만큼이나 감동적이다. 저녁이 있는 삶을 찾아서 퇴근하는 모습도 뭉클하다. 출퇴근은 응원받아 마땅한 숭고한 스포츠다. 페퍼톤스 음악 ‘Ready, Get, Set, Go!!’가 듣고 싶어 지는 때가 오면 매년 망상에 빠진다. 지각하지 않으려 힘껏 달리는 사람들을 음악과 함께 격려해주는 거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응원을 받으며 출근하는 기분은 어떨까? 퇴근 후 터덜 터덜 집 앞에 도착한 사람들에게는 메달을 걸어주고 하이파이브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