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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어리 Mar 31. 2021

나태하지 않은 자, 돌을 던지십시오

열정과 재능은 없어도 ‘○○’ 하나만 있다면

 나태 지옥행 티켓 예매하기 좋은 4월이다. 수면 바지를 옷장에 집어넣어도 될 만큼 날이 따뜻해졌다. 면 파자마 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맨발로 느끼는 바닥 냉감이 기분 좋다. 평안하고 아늑한 봄 저녁에 1년 전을 회상한다. 2020년 4월 8일. 당시 306,610원을 내고 한 온라인 교육 사이트에서 유명 작가님의 자기 계발 강의를 신청했다.(김 작가님이라 하겠다.) 30만 원이면 돈가스를 33번이나 먹을 수 있는 거금이다. 설날이 한참 지난 2/4분기에 느낀 때늦은 자기 효능감이 과소비를 불렀다. 누구나 ‘수학의 정석’ 1단원은 열심히 풀지 않는가. 뒷부분을 안 봐서 문제지. 30만 원짜리 강의 또한 오리엔테이션과 1강을 제일 열심히 듣다 말았다.


 결코 적지 않은 수강료는 김 작가님의 1회 코칭권을 포함한 가격이다. 당연히 코칭은 받지 않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수강률은 20% 박스권에 머물렀다. 강의는 건성으로 들으면서 코칭을 청하기가 창피했다. 종강까지 30주가 걸렸다. 인터넷에서 30주를 검색하면 가장 먼저 ‘한눈에 보는 임신 10개월’이라는 정보가 나온다. ‘28~31주. 쉽게 피로해지는 시기로 휴식과 여유를 가지시라’고 나와 있다. 자궁 속 태아가 감각기관과 골격이 완전히 발달한 아기로 자라난다. 이토록 길고 충분한 시간이다. 30주 동안 돈은 돈대로 내고 공부는 하지 않은 나는 성장하기는커녕 후퇴한 것이나 다름없다. 부끄러운 마음에 태아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거절하기 어려운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갑자기 온라인 교육 회사에서 특별 이벤트라며 한참 전에 종료된 강의 수강기간을 주말 동안만 되살려준단다. 금, 토, 일, 월 4일 안에 완강할 수 있을까?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모니터 한쪽 구석에 노션을 열고 열심히 메모하며 모든 강의를 1.5배속으로 들었다. 희한하게도 종강일이 까마득할 때는 1배속으로 또렷하게 들어도 자꾸 흐트러지던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채무를 탕감받는 조건으로 노역하는 빚쟁이가 된 기분인데 의욕이 절로 난다. 거의 8개월 동안 20%대였던 수강률이 일요일 저녁에는 70%를 돌파했다. 사람은 형편이 좋을 때는 건성이다가 아쉬운 상황이 되어야만 집중력을 발휘한다.


 월요병을 느낄 새도 없이 시간을 쪼개서 강의를 듣고 출근했다. 자정까지 열심히 달려서 완강한다는 계획은 퇴근하기도 전에 망가졌다. 알고 보니 특별 수강기간은 월요일 오후 2시까지였다. 월급 개미로서 강의를 듣자고 오후 반차를 낼 수도 없는 상황에 허탈했다. 강의 최종 수강률 77%. 이렇게 1년 만에 얻은 기회를 또다시 날렸다. 강의 10개만 들으면 완강인데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교훈을 다시 느꼈다. ‘완강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들만 한 진도까지만 듣게 해 준다. 재수강을 유도하려는 교육회사의 상술 섞인 의도인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했다는 실망감으로 ‘내 강의실’ 화면을 바라봤다.


 교육생 커뮤니티 대화방에 들어가 보니 다행히 혼자가 아니다. 자기가 원해서 돈을 내고 교육을 신청해놓고 수강을 미루다가 후회하는 사람이 흔하다. 대학 입시에 목숨을 거는 초중고 12년, 취업 때문에 학점의 노예가 되는 대학교 4년을 겪은 지 오래다. 더는 담임 선생님이나 교수님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나이다. 이제는 공부하라는 부모님 잔소리도 들을 일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어쩌다가 셀프 고문을 하는 샐러던트로 최종 진화한 걸까? 시키지도 않은 교육을 들으며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이 많은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아마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내면 아이의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배움의 과정에 죄책감은 내려놓자. 무엇이든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면 과정이 조금 더디더라도 끝까지 해내면 된다. 더 나은 삶의 추구, 더 훌륭한 무언가가 되기 위한 학습이 부진하면 어떤가. 너무 자책하지 말자. 중요한 건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확인이다. 강의 진도가 늦다고 나무라는 사람도, 돈 들여 수강한 강의 아웃풋을 검사하는 사람도 없다. 교육기관이야 수강료만 제때 받으면 땡큐다. 그럼에도 자신을 채찍질하고 죄인처럼 낙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목표를 이룬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열등감과 자격지심 때문은 아닐까?


 자기혐오는 그만. 우선 뭐라도 배우려고 시도했다는 점에 박수를 보내자. 열정과 재능은 없어도 진심 하나만 있다면 우리는 해낼 가능성이 있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원하는 만큼 노력할 수 있다. 노력하는 만큼 발전할 것이다. 힘들면 속도를 조금 줄이거나 잠시 쉬었다 하면 된다. 말 그대로 계속하기만 하면 도착할 것이다. 매달 꾸준한 수입을 버는 직장인은 수강 기간과 평가의 압박에서 자유롭다. 진도를 다 빼지 못한 채로 종강을 했다면? 시간과 돈을 더 들여서 배우면 그만. 배움에 진심이라면 우리는 언젠가 같은 장소에서 만날 것이다. 먼저 출발한 사람이 나보다 빨리 도착했을 뿐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우리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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