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작가님 죄송합니다

키보드와 태블릿과 책, 그리고 부처님

by 정어리

9% 수강 중. 만료일 175일 남음. 일상 드로잉 온라인 수업을 신청하고 41일, 만 1개월 하고도 12일이 지났다. 책 읽고 글 쓰는 사람에서 그림도 그리는 사람이 되어보자던 다짐이 무색하다. 이대로 가다간 온라인 강의 사이트에 30만 원 돈을 기부할 기세다. 도무지 강의를 들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 강의를 신청했지만 실습이 두렵다. ‘글이 정말 한 줄도 써지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은 글쓰기를 못 하겠다는 바로 그 글을 한 줄 쓰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림을 정말 선 하나도 못 긋겠어요.’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가 없다. 큰일이다. 글 쓰는 일 하나 만으로도 고민인데 괜히 그림에 도전했나 후회된다.


오늘의 글을 쓰는 동안 옆자리를 아주 잠시 동안 지켜준 사과입니다.


책장을 정리했다. 새로운 책을 꽂을 공간이 없다. 새로운 책장을 놓을 공간도 없다.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책 다섯 권을 분리수거 폐지함에 버렸다. 가진 책 중에 90%는 읽지 않았다. 여기까지만 정리하고 외출했다 돌아와서 그림 강의를 들을 계획이었다. 어림도 없다. 분리수거장을 들렀다가 그 길로 서점에 가서 다른 책을 사 왔다. ‘모든 것이 되는 법’.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어서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살 책이 맞는가? 읽은 책 보다 읽지 않는 책이 늘어만 간다. 펼쳐보지 않은 책은 마음의 부채처럼 느껴진다. 경제신문을 펼치면 가계부채 1000조가 넘었다는 내용을 자주 본다. 곧 집에 책이 1000권을 넘을 것 같다.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는 편이다. 사람의 뇌는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원시시대부터 적의 위협에서 안전하려면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한곳에 오래 집중할 필요가 없다. 뇌보다 훨씬 빨리 문명이 진화한 덕분에 안전을 보장받으며 산다. 뇌의 집중력은 여전히 오래가지 않는다. 스마트폰, 컴퓨터의 멀티 태스킹 때문이라고 비난의 화살을 돌려본다. 서점에 가면 늘 하는 루틴이 있다. 책을 두고 바람을 피운다. 키오스크에서 도서명을 타이핑한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누르면서 시선은 평대를 향한다. 신간 도서는 언제나 아름답다. 요염하게 누워있는 책 표지를 구경한 다음 책장 속에 서있는 책을 찾으러 간다.


낮에 글쓰기 책 한 권, 글감 찾을 책을 한 권 샀다. 저녁에 산 책 까지 3권이다. 아무리 독서법을 연습해도 하루에 책을 세 권 읽을 수는 없다. 밑줄을 치고 포스트잇 인덱스 탭을 붙여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정리해놓아야 읽은 기분이다. 다 읽고 서평이나 독후감을 써야 제대로 소화한 기분이다. 식사 후 마시는 아메리카노처럼 여기까지 마쳐야 책 한 권이 싹 내려가는 느낌이다. 뱃속이 편안하다.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에 한 두 권을 읽는 속도로 구매량을 따라잡을 일은 앞으로도 없다. 일 년 정도 금서 하지 않으면 어림도 없다.


글을 잘 쓰고 싶다. 방앗간 기계처럼 책을 탈탈 털어 넣으면 덜덜덜 하면서 멋진 에세이 한 편을 고운 입자로 대야에 한 가득 쏟아내고 싶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다. 글에서 미처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그림으로 직접 보완하면 얼마나 좋을까? 책을 많이 읽고 싶다.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의 저주에 빠져도 상관없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되고 싶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체력과 시간이 유한한데 어쩌라는 것인가 자문하고 싶다.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이 되지 못해 괴로워한다. 못하겠다고 힘들다고 우는 소리를 누군가가 들어주면 좋겠다.


데즈카 오사무의 붓다, P.47, 하타 슈에이 해설/정상교 옮김, 바다출판사, 2020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다그치고 몰아붙인다. 다시 한번 짚어본다. 아무도 글 쓰고 책 읽고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괴로운 이유가 무엇일까도 생각해본다. 낮에 읽은 책 ‘데즈카 오사무의 붓다’를 펼쳐본다. “세상 모든 고통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원인을 알면 괴로움을 멈추는 방법을 안다. 그로 인해 마음을 구하는 안락함이 생기리라.” 붓다의 가르침이다. 원인을 정확히 알려면 자신의 마음속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괴롭다. 욕망의 불꽃이 타오르는 상태를 번뇌라고 한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게으르고 싶은 욕망이 공존한다. 한 마디로 실력은 없지만 인정은 받고 싶다.


욕심을 내려놓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 욕망을 채우려고 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꼭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좋으니 애쓰지 말자고 자신에게 말을 걸어 본다. 글이 쓰고 싶으면 쓰자. 책을 읽고 싶으면 읽자. 그림을 배우고 싶으면 배우자. 인정을 바라지 말자. 원하는 일을 행하는 데에 행복이 있다고 믿는다. 정작 부처님은 행복과 불행보다 더 중요한 차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욕망을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도 욕망이다. 맞는 말씀이다. 뜬금없이 부처님은 취미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모처럼 마음의 짐을 덜어낸 중생으로서 재수 작가님의 다음 강의를 눌러본다. 수강률 100%를 채우겠다는 욕망을 버린다. 욕망을 버리겠다는 욕망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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