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 '밤 10시 영업제한'을 기억하자. 칵테일 바가 처음이라면 적어도 영업시간 정도는 미리 알아보자. 요즘은 웬만하면 인터넷에 휴무일도 있으니 꼭 체크해보도록 하자. 토요일에는 시간을 몰라서 일요일에는 쉬는 날이라서 허탕을 쳤다. 주말에 시간과 수고를 들여서 90년대 시트콤 등장인물이라도 된 듯이 바보짓을 하고 있다. ‘동네 칵테일바 갔다가 망한 썰 풉니다’라고 말할 소재라도 생겼다고 애써 위로했다. 다음 가게로 향했다. 강풍이 불고 추울 거라더니 웬일로 일기예보가 맞았다. 앞머리를 사정없이 흩트리는 바람의 장난을 꾹 참는다.
이럴 거면 차라리 집에서 티셔츠에 쭉쭉 늘어나는 잠옷 바지를 입고 유튜브나 볼 걸 그랬다. 요새 빠슐랭이라는 바텐더의 ASMR 영상에 며칠째 푹 빠진 바람에 일어난 일이다. 우리 집 고양이 앞에서 책상 위에 올린 손을 이리저리 흔들면 금세 눈이 ‘띠용’ 하는 모양으로 변한다. 취향은 다양하겠지만 ASMR 영상을 좋아하는 사람도 눈 앞의 시청각적 자극에 몰입한 고양이와 비슷하다. 지거에 술을 따라 다시 컵에 쪼르륵 붓는 소리, 바 스푼으로 컵 안에 담긴 얼음을 휘저으며 달그락 거리는 소리, 유리컵이 청명하게 울리는 소리, 쉐이커 달각달각 흔드는 소리를 무척 좋아한다. 다른 술은 몰라도 칵테일은 미각뿐 아니라 청각으로도 마실 수 있다.
지독한 집돌이 아니랄까 봐 집이 멀어질수록 이불속이 그리워진다. 사람들이 둘둘 셋셋 모여 형광등 아래서 고기와 술을 즐기는 문정동 생고기와 곱창집을 지난다. 마침내 네온사인이 켜진 한 칵테일바 앞에 도착했다. 혼자 소주를 마시러 포차에 간다면 좀 어색하다. 홀로 봉구비어 같은 맥주집에 가는 것도 어쩐지 이상하다. 편의점에서 술을 사서 집에서 과자를 까먹으며 마시는 모습이 아무래도 더 어울린다. 칵테일이 마시고 싶은 사람은 내성적이든 외향적이든 일행이 있든 혼자든 상관없다. ‘누구든지 조용히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은 들어오라’는 무심함이 바의 매력이다. 애초에 음주보다는 청취가 목적이다. 바의 문을 열었다.
들어가서 인사하자마자 영업시간이 몇 시까지인지 물었다. 밤 10시. 손목시계를 보고 안심했다.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았다. 코로나19 출입 명부를 적고 가게 안을 둘러보다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유튜브 영상 속 셔츠를 멋지게 입은 바텐더는 없었다. 네이비색 후드티를 입은 남성과 야구모자를 쓰고 긴팔 티셔츠를 입은 여성 두 분이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런 번화가 1층에 고급스러운 바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칵테일이 잘 나가냐고 물었다. 테킬라 선라이즈와 보드카 선라이즈를 추천받았다. 멋대로 둘 중에 테킬라가 보드카보다는 덜 독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테킬라 선라이즈를 한 잔 주문했다.
내심 바텐더가 ‘빠슐랭’ 아저씨처럼 한 잔 만들어주길 기대했다. 유리잔에 얼음을 한 스쿱 담아 잔을 차갑게 식힌다. 신선한 오렌지를 반으로 잘라 믹서기에 누른다. 100ml만큼 주스를 짜낸다. 유리잔에 채웠던 얼음을 비운다. 테킬라를 지거에 50ml만큼 따른다. 각얼음을 스쿱에 가득 채워 잔을 채운다. 아까 짜낸 오렌지 주스를 붓는다. 그다음 레몬주스를 10ml 정도 넣는다. 스푼에 붉은색 그레나딘 시럽을 두 스푼 정도 넣는다. 오렌지로 장식하고 민트를 조금 넣으면 완벽하다. 잘 만든 테킬라 선라이즈는 붉은색과 노란색의 그라데이션이 예술이다. 일출할 때 붉게 타오르는 태양처럼 보이려면 오렌지 주스와 그레나딘 시럽의 색 조화가 중요하다. 일출을 뜻하는 선라이즈처럼 서서히 색이 섞이면서 붉은색이 옅어진다.
‘쨍그랑!’ 유리잔이 깨진 소리가 아니다. 현실 ASMR을 동경했던 환상이 깨진 소리다. 후드티를 입은 바텐더는 오렌지 대신 냉장고에서 꺼낸 델몬트 주스를 잔에 졸졸 따랐다. “테킬라 선라이즈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재즈 대신 윤종신의 ‘좋니’가 나오는 바에서 칵테일을 빨대로 쭉쭉 빨아 마셨다. 바텐더가 밑에부터 저어 마셔야 맛있다고 알려줬다. 그제야 시럽이 가라앉은 밑 부분을 휘저어 마셨더니 무척 달콤했다. 그렇지. 술집에 온 사람이 술맛이 중요하지 무슨 다른 걸 따지고 있나. 코로나 시국에 멀리 이태원까지는 가지 못해도 동네에서 마실 수 있음이 어디인가. 금방 잔을 비우고 약간의 취기를 느끼며 가게를 나왔다.
딱히 술에 취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친구는 이성 바텐더와 나누는 대화를 기대했냐고 물었다. 아니다. 칵테일을 만드는 소리가 좋아서이고 그게 전부다. 얼마 전에 글쓰기 모임에서 ‘I Miss My Bar’(imissmybar.com)라는 사이트를 추천받았다. 여기서는 오로지 듣고 싶은 소리만 선택해서 들을 수 있다. 바텐더가 일하는 소리, 칵테일을 서빙하는 소리 외에 밤 분위기를 더할 수도 있고 빗소리도 추가할 수 있다. 모임 대화방에 이런 음향과 분위기에 가장 가까운 바는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집단지성의 힘은 순식간에 추천 가게 리스트로 대화방의 긴 스크롤을 채웠다. 가게들은 대부분 경복궁에 있으며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코블러(서울 종로구 사직로 12길 16)
‧ BAR CHAM(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7길 34)
‧ 어비스(서울 종로구 사직로 12길 19-17, 바에 고양이가 돌아다닌다.)
‧ 타로맨스(서울 강남구 도곡로 11길 10, 전문 타로 상담을 서비스로 해준다.)
어째서 경복궁 근처 가게를 많이 추천해준 걸까. 글쓰기 모임 장소가 안국이라 그렇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았다. 코로나 때문에 5인 이상 모임이 금지된 후로 실제로 모일 일이 없었다. 목소리를 들을 일도 없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마저 본인 얼굴이 아닌 사람이 많으니 누가 누구인지 아득하다. 팽창하는 우주처럼 서로 멀어진다. 그 사이를 빈 공간이 채운다. 사회생활을 하며 사람에 치인다. 두 팔 벌려 무리를 밀치고 그 반작용으로 우주인처럼 멀어지고 싶다. 사람은 차단하고 소리에 몰입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ASMR을 듣는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그 소리는 사람이 만든다. 덕분에 오늘도 잠옷 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달그락 소리를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