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116***** (주)ㅇㅇ북스 입금 967,000원’ 출판 계약금이 입금되었다. 비 내리던 1월 21일 홍대에서 출판 계약서에 사인한 지 한 달 만이다. 입금 일시는 2월 26일 금요일 13시 49분 32초. 스마트폰 뱅킹 앱의 푸시 알람 진동이 울렸다. 사무실에서 애써 내색을 숨겼지만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그날 저녁 퇴근길 차 안에서 출판사 부장님께 감사 메시지를 보냈다. ‘자축하는 의미로 돈가스 한 번 먹고 고양이 선물용 북어 트릿을 한 통 사겠습니다.’ 물론 돈가스와 고양이 간식을 사는 데 백만 원 가까운 돈이 들지는 않았다. 북어 트릿을 2묶음 사긴 했지만. 잔액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은 오히려 적자다.
계약금으로 고양이 '사과'에게 북어트릿을 두 통 사줬는데 벌써 한통의 절반을 먹었습니다.
‘다음과 같이 계약을 의뢰하오니 업무에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타 부서에 보낼 협조문을 타이핑한다. 금액은 팔천 이백만 원, 예산 과목은 일반관리-홍보비. 수천만 원부터 수억 원의 계약금도 감정 없이 처리한다. 평생 큰돈을 만지는 게 일상인 은행원의 심정도 이럴까? 문서에 찍힌 금액은 돈이 아니라 숫자 같다. 그 숫자가 남의 돈이 아니라 내 돈이 되다 보니 완전히 달랐다. 천 원, 몇백 원의 입출금도 거미가 거미줄의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듯 민감하다. 오직 한 달에 한 번만 입금되는 직장인의 계좌에 두 번째 입금액이 들어왔다. 큰 사건이다. 처음으로 계약상 ‘을’이 되어 받은 돈. 무거웠다. 적지 않은 금액. 가볍지 않은 책임감이다.
통장에 입금된 96만 7천 원은 전산시스템에 표시된 숫자가 아닌 진짜 돈이다. 그런데 이제 한 가지 의무를 얹은. “홍보 대책을 좀 세워봐요.” 계약서에 사인하기 열흘 전에 받은 출판사 부장님의 메시지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브런치, 블로그, 트위터 등 어느 곳에서도 유명하지 않은 나. 원고를 이곳저곳 보내며 출판 기획서로 자신을 세일즈 하던 때와는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한 번이라도 월급 외에 다른 돈을 벌어보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아마도 나의 멘토 중 한 분인 신사임당 님 유튜브에서 들었던 조언이다. 난생처음으로 그럴듯한 월급 외 수익을 얻은 기쁨보다 신사임당 님만큼 유명하지 못한 내 신세를 걱정했다.
직장인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겠다는 목표는 생각보다 기준이 높다. 틈틈이 글을 쓰는 회사원 겸 작가, 일주일에 한 편씩 영상을 올리는 퇴근 후 유튜버, 내성적인 사내 이미지와 딴 판인 인스타그래머. 월급 개미가 꿈꾸는 ‘다른 무언가’란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인플루언서를 의미한다. ‘능동적으로 선택한 일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성과를 내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사람.’ 이 전제를 빼면 누구나 당장이라도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회사 밖을 나서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입증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이제까지는 회사에서 시키는 일만 해도 몇백만 원을 벌었다면, 이쪽 세계는 레벨 1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이다.
눈 감고 기도할 만큼 간절했던 계약을 따냈다. 계약금도 받았다. ‘이제 어떡하면 좋지?’ 투고 전보다 더욱 막막한 심정으로 매일 밤 고민했다. 이제 정말로 진지하게 뭔가를 해야 한다. 이후 3개월간 사오십 만 원짜리 인스타그램 강의 2개, 유튜브 강의 1개, 글쓰기 강의 2개를 신청해서 지금도 듣고 있다. 교보문고 회원 등급은 원래도 플래티넘이었으나, 2~4월 796,240원만큼 소비해서 다가올 5월에도 영예의 플래티넘 등급을 유지할 전망이다. 예스24에서도 616,140원을 쓰는 바람에 더블 플래티넘 회원이 되었다. 그중에 글쓰기 책은 어림잡아 18권, 책 쓰기 책 5권, 훌륭한 작가의 좋은 글을 읽어야 한다고 해서 문학 장르도 쓸어 담았다.
불안감이 소비를 부른다. 책 <밥벌이로써의 글쓰기>에서 만줄라 마틴이라는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글 쓰는 인생이 하나의 공상이라면 본업을 그만두는 것은 또 다른 공상이에요.” 또한 이 책을 소개한 우리나라 소득 최상위 작가로 알려진 장강명은 <월간 채널예스> 2019년 10월호에서 말했다. 1만, 2만 부가 팔리는 작가는 자기 인세로는 외식 즐기기도 빠듯하다고. 계약금을 받고도 쇼핑몰 푸드코트를 벗어나지 못한 처지로서 숙연해진다. 설령 유망 작가가 된다 한들 기본 14,000원부터 시작하는 돈가스 전문점 사보텐을 고민 없이 드나들 수 없다. 출판업계 전망 글을 읽을수록 아직 발도 못 담근 작가 지망생은 마음이 조급해진다.
첫째, 이왕이면 팔리는 작가가 되고 싶다. 둘째, 찾아주기 전에 다가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셋째, 첫 책을 인생의 마지막이 아닌 첫 번째 기적으로 남기고 싶다. 이 3가지 이유가 작가 지망생이 출간 계약 후 석 달 만에 벼락 거지가 된 이유다. 계약 전까지 나는 부표였다. 주어진 일을 수동적으로 처리하며 해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는 직장인. 계약금을 떠안고 이제 더 깊은 삶을 살고 싶다. 96만 7천 원을 500원짜리 동전으로 바꾸면 무게가 대략 15kg이다. 이는 해녀들이 고무 옷의 부력을 이겨내기 위해 허리에 차는 연철의 무게와 비슷하다. 인생을 바꿀 만큼 큰돈은 아니지만 부유하는 삶의 방향을 거스르기에는 충분히 묵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