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을 듣고 커피를 마신다면 당신은 하수다
"커피 드실래요?" 직장 동료이자 후배는 아침에 출근하면 가끔씩 이렇게 묻곤 했다. 최소 30분은 일찍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고 자리를 정돈하고 커피를 마셔주는 게 미덕이었다. 지금은 정시에 맞춰서 헐레벌떡 출근하는 0점 직원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커피를 마시려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커피머신이 있는 지하 구내식당까지 내려가야 했다. 일이천 원을 더 내면 2층 카페에서 더욱 그럴싸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동료가 커피 타임을 제안할 때마다 나는 '이 친구는 커피를 좋아하는구나.'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한 번은 커피를 마시러 가자는 그의 말을 듣고 혼자 마시고 오라고 식권 한 장을 내밀었다. 나름 배려해서 주는 선물이었다.
“아잇, 선배님은 제가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요?” 그는 한심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다. 커피를 마시자는 말은 원두를 곱게 갈아 내린 흑갈색 물을 음용하자는 뜻이 아니다. 컵에 담긴 330ml 액체를 모두 들이켜서 잔량을 0ml로 만드는 과업도 아니다. 몸의 감각을 고조시켜주는 카페인을 섭취할 겸, 이를 빌미로 잠깐 이야기를 하자는 뜻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데 우리 잠깐 숨좀 쉴까요.’ ‘어깨가 결리는데 잠시 풀어줄까요, 고개도 들고 허리도 펴 볼까요.’ 이런 뜻이 아니겠는가. 핀잔을 듣고서야 관계에서 문맥을 읽는 나의 능력이 조금 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식권을 들이대다니!
사실 대학교 때부터 철이 없었다. 공강 시간에 카페에 가서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원샷하고 빈 잔을 멀뚱멀뚱 보고 있었으니까. “아, 무슨 아메리카노 원샷해?”라고 웃으며 건네는 말이 칭찬인 줄 알았다. 물론 이때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이 쉽게 달아오르던 20대였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실언할 것 같고 눈 앞에는 커피가 있으니 원샷할 수밖에. 돌이켜보면 강의가 비는 시간과 수업 전후마다 카페에서 숱한 시간을 보냈다. 소중한 줄 몰랐던 시간들 속에서 오로지 커피에만 몰두할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망설이고 무슨 뜻인지 몰라서 넘겨짚는 동안 좋았던 날은 다 갔다.
카페인을 과다 섭취하면 수면장애가 온다는데 전혀 못 느끼겠다. 5월 첫째 주 중간에 어린이날이 있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권투경기로 치면 그로기 상태일 때 딱 맞춰 공이 울렸다. 주먹에 맞은 건 아니지만 머리가 아프고 무겁다. 퇴근길에 두통약을 사는 것마저 귀찮아서 곧장 집에 왔다. 고양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현관에서 뒹굴며 반긴다. 다리에 몸을 비비고 울어대며 보챈다. 배가 고팠나 보다. 얼른 사료를 줘야겠다. 간식도 토핑 해줘야지. 먹기 좋게 부숴줘야겠다. ‘그래 그래. 다 됐다.’ 그릇을 내려놓으려다 멈추고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한참 동안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밥을 달라는 말이 아님을 이제야 알았다. 커피를 마시자는 말이 아니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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