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숫자가 나오지?’ 눈에 힘을 풀었다가 다시 부릅뜨고 화면을 보았다. 엑셀 칸에 숫자를 몇 개 바꿔서 넣어보았다. ‘44,495원? 한 달에 5만 원도 안 남네.’ 출근할 시간이 임박했다. ‘야 이렇게 살 거면 왜 살지.’ 회의감에 당장 현관문을 밀 의지조차 없다. 44,495원은 월급에서 저축과 소비를 제하고 남는 순수 잔액이다. 열심히는 사는 데 어째서 마음의 여유는 없을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 가계부 작성은 일주일이나 걸렸다.
내 또래 사람들은 얼마를 벌고 쓰고 저축할까? 데이트 비용은 얼마나 쓸까? 자산은 어느 정도일까? 어느 인류학자가 일생에 걸쳐 연구해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다. 다행히 신한은행에서 대신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름도 잔인한 ‘보통 사람 금융 생활 보고서’다. 평범한 삶을 살기란 어려울 텐데. 보고서에 의하면 경제인구의 월평균 소득은 478만 원이다. 유의미한 수치가 두 개 더 있다. 월평균 저축‧투자액이 109만 원이다. 평균 총자산액은 4억 3,809억 원이다.
이런 뼈를 때리는 보고서는 뭐하러 찾아봤을까 후회가 된다. 평균 소득, 평균 저축‧투자액, 평균 총자산액. 이 세 가지가 보통일 줄 알았던 미혼 직장인인 나를 기형적 삶으로 인도한다. 고백하자면 나의 소득액은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총자산은 더는 밝히기가 창피할 정도다. 정말로 평균 자산이 4억이 넘는다고? ‘억억’ 울고 싶다. 보통이니 평균이니 하는 말이 더욱더 초라하게 만든다. 단, 저축‧투자액은 평균보다 두 배 가까이 높다.
자산이 낮을수록 저축‧투자를 높이고 소득을 높여야 한다. 연예인인 박명수의 말처럼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너무 늦었다.’ 1년에 천만 원을 모으라는 말. 재테크족에게는 어떤 등용문인 것처럼 흔하게 접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몇 년 일찍 인생의 전환점을 돌고 앞서 달리고 있다. 일찍부터 착실히 돈을 모았다. 연애를 클리어하고 결혼에 골인했다. 집도 구했다. 전부 내 탓이요 생각하니 질투심은 들지 않는다. 스스로에게 분한 만큼 분발해야 한다. 한 달에 167만 원씩 1년에 2천만 원을 모아야겠다.
추가 10만 원은 자유 입출금 계좌에, 또 다른 10만 원은 고양이 통장에 넣는다. 나머지 5만 원은 셀프 선물 개념으로 적금을 붓는다. 그다음은 전부 나갈 돈밖에 없다. 월세, 양묘비, 통신비, 실비 보험비, 코웨이 렌탈비, 생필품, 세탁비, 교통비, 통신비를 뺀다. 구독하는 것도 많다. 쿠팡 로켓와우 회원비, 네이버 멤버십비, 노션 구독비, 어도비 포토샵 이용료를 뺀다. 노트북 할부도 제외한다. 트레바리 독서 모임비도 뺀다. 이것저것 신청한 강의비 월 할부가 나가고 나면 남는 돈이 극히 줄어든다. 여전히 믿을 수가 없다.
한 달 식비 25만 원, 외식비 10만 원, 카페비 5만 원, 케이크는 이제 안녕이다. 솔직히 많이 먹는다. 엄밀히는 의식주에 필요한 돈만 있으면 사는 데는 문제가 없다. 나머지 자잘한 용처에 쓰고 싶은 것 다 쓰면서 돈이 없다는 투정이 찌질할 수도 있다. 포기 못 하는 즐거움과 인간의 존엄성 때문이라고 포장해본다. 사람 만날 돈이 없는 것보다 한 달에 삼십만 원씩 쓰던 책값을 만 오천 원으로 줄인 게 아프다. 가능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열심히 벌어도 잔액이 넉넉하지 않으니 마음의 여유가 없다. 이제야 알았다. 남들처럼 평범하게 연애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지 못할 것 같은 막연한 자신감 결여의 원인.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친구에게 말했다. “‘월 5만 원만 쓸 수 있습니다.’라고 쓴 팻말을 들고 연애 시장에 나간다면 아무하고도 연애할 수 없을 거야….” 친구가 의외로 “오히려 마음에 드는데? 나머지 월급은 다 저축한다면.”이라고 응수했다. 그는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어차피 집은 못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