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샤워할 때마다 미세한 양의 녹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아는가? 1년 만에 샤워기 헤드를 바꾸려고 알아본 바로는 노후주택일수록 물이 불순할 가능성이 크다. 마트를 둘러보니 불순물과 잔류 염소를 걸러주는 필터형 제품이 대세였다. 작년에 난리가 났던 ‘수돗물 유충’ 사태 이후로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동안 잘 썼던 샤워헤드를 호스에서 분리해보았다. 과연 은근히 녹슨 이음새가 꺼림칙했다. 배관을 타고 불순물이 나온다 한들 지금까지 잘만 살아왔기에 억울한 감정은 없었다. ‘무엇이 다른가?’ 뒤돌아서서 물줄기를 맞아 보았다.
“퍼버버버….” 부드러운 바람이 귓바퀴를 어루만졌다. 샤워기가 원래 이렇게 바람을 분사하는 물건이었나? 공기처럼 고운 물안개가 사각 부스를 채웠다. 바디워시를 쓰지 않았는데도 거품이 몸을 감싼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욕실은 본래 사람을 위한 공간이었다. 낯선 행성에 착륙한 탐험대가 원시 유적을 발견하지만, 사실은 외계인의 우주선이었음을 깨닫는 SF영화의 클리셰 같았다. 직전까지 썼던 제품은 물을 세게 틀어도 물줄기가 굵게 줄줄 흘러나왔다. 동물이 놀라지 않도록 고안된 제품이기 때문이다. 1년 동안 고양이 목욕은 서너 번 시킨 게 전부다. 그동안 아침저녁 하루 두 번씩 동물용 샤워기로 몸을 씻은 이는 나였다.
집사라면 누구나 ‘주인님’에게 아낌없이 집을 내준다. 이윽고 동물 친화적으로 변한 집에 익숙해진다. 하마터면 샤워 부스와 타일 바닥을 팔 아프게 광내고 고양이용 샤워기를 그대로 놔둘 뻔했다. 일주일 내내 이토록 집 청소와 단장에 진심인 건 ‘진짜 주인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며칠 전 공인중개사에서 걸려온 전화가 우리의 일상을 흔들었다. 원주인이 내놓은 이 집을 보러 올 사람이 있다고 했다. 집에서 쫓겨날 걱정에 음료수를 들고 사무실을 찾았다. “고양이는 잠시만 좀.” 중개사 사장님의 단호한 말씀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동물병원 호텔 서비스를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집은 치울 물건들로 가득했다. 정리 노동보다 괴로웠던 건 고양이가 보는 앞에서 캣폴과 창틀 선반을 해체하는 일, 스크래처를 치우는 일이었다. 자신의 최애 공간을 부수고 없애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웠다. 며칠 사이에 애묘 용품이 우거졌던 작은 원룸은 인간에게 개발된 밀림처럼 말끔해졌다. 나의 트루 킹, 진짜 주인님을 맞이할 준비는 순조로웠다. 은은한 비누 향이 나는 탈취제를 여기저기 비치했다. 답답한 전망을 보완해줄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Good day light’ 포스터 액자도 벽에 기대 놓았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인님을 기다렸다.
결론을 밝히면 우리의 보금자리는 팔렸다. 새 주인은 집만 사지 않았다. 정확히는 집 안에 들어있는 나까지 매입했다. 농노가 토지를 소유한 귀족에게 세를 바치듯, 앞으로는 나의 새로운 랜드로드에게 매월 월세를 바치면 된다. 고작 한 팀만 집을 보러 와도 이 소동을 겪어야 하는 나로서는 불안정의 종식이 절실했다. 랜드로드가 이 집이 마음에 들도록 꽃단장하고 현혹해서 되도록 한 번에 거래를 성사시켜야 했다. 방문 날 점심때에 맞춰 커피 향과 밥 짓는 냄새로 공간을 채우고 재즈 음악을 틀어놓은 이유. 절박함 때문이다.
집 없는 설움이다. 세입자 주제에 무턱대고 고양이를 데려온 것이 실수였다. 새 주인님이 나보다 한 살 어리다는 사실은 더 큰 실수를 일깨워주었다. 어째서 나는 일찌감치 내 집 마련을 목표로 정하고 모든 노력을 쏟아붓지 않았을까. 집주인 내외는 어떻게 벌써 결혼했을까. 어떻게 이미 자가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주말에는 세컨드 하우스를 쇼핑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걸까. 집 단장에 일주일을 꼬박 투자한 자괴감에 질투심마저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