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랐는데 저 시한부였네요?

3년 차 홍보팀 직원이 깨달은 것은?

by 정어리

"잠시만요.. 혹시 우리 인사이동이 12월에 있는 거죠?"


E9-5번 서가를 뚫어지게 보다가 후배에게 카톡을 보내 물었다. 답이 없다. '마케팅.. 마케팅.. 도대체 마케팅이 뭐야? 그리고 나는 홍보팀인데 어째서 마케팅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쩔 수 없이 일요일 밤이 되면 몸을 피곤하게 만드는 온갖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금요일과 토요일을 아무리 내 삶에 충실히 보내려 해도 결국은 기승전 회사 생각이 난다. 월요일 이브를 앞둔 우리네 직장인들의 모습이다.


머릿속으로 그리는 주말 저녁은 문학이나 심리, 과학 아니면 예술 코너에 있는 책을 우아하게 사라락 넘겨보면서 마음의 양식을 쌓는 모습이다. 어디까지나 어렴풋한 상상일 뿐이다. 실제로는 그만한 여유가 없다. 나의 몸과 마음은 A나 F코너보다는 E코너를 원한다. 우리 동네 서점 E9-5번 서가 분류는 '마케팅'이다. 경제·경영 분야 책들이 모여있는 E코너 중에서도 하필이면 마케팅이다. 황금 같은 주말에 월급쟁이 직장인이라면 재테크나 자기 계발 코너에 누워있는 책들을 골라보며 조금 더 '자신을 위한' 생각에 몰두해야 하지 않은가. 양팔을 손이 닿는 데까지 뻗어 서가의 끄트머리를 잡고 턱걸이라도 하려는 듯이 힘을 줬다. 이렇게 두 팔에 힘을 줘본 적은 오랜만이다.


한참 있다가 후배로부터 카톡 답장이 왔다.

"맞아요. 왜요?"


답장이 오기는 오는군. 씹히지 않아서 다행이다. 노파심에 구태여 설명하자면 주말에 업무 연락을 하면서 직장 내 괴롭힘을 즐기는 타입의 선배는 아니다. 오늘은 웃긴 동영상을 보라고 유튜브 링크를 한 줄 툭 보내준 후배가 먼저 시작했다. 나는 결백하다. 후배의 답장처럼 다음번 인사이동은 12월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했다. 답 메시지를 보냈다.


"오. 저 시한부네요 홍보팀."


지난번 7월 1일 자 조직개편과 인사이동에서 나는 살아남았다. 부서를 옮기지 않고 직무를 바꿨다. 이후로 6개월의 홍보팀 생활이 남았음을 깨달았다. 이 글을 쓰는 7월 18일 일요일을 기준으로 하면 6개월 조차 남지 않았다. 어디 볼까? 6월 말에는 언제 2021년의 절반이 지나갔나 놀랐다. 오늘에 와서는 또 언제 그로부터 18일이나 지났는지 또 한 번 놀란다. 보시다시피 올해 말까지 남은 시간은 6개월이 아니라 정확히 167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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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무순환제'라는 개념을 혹시 들어보셨는지. 3년이 지나면 직무를 바꿔야 하는 이 제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적어도 우리 회사에는 없다. 직무를 순환한다. 곧 부서를 옮겨야 한다는 뜻이다. 임원 정도는 되어야 하는 일이 고정이랄까. 생각해보면 임원의 임기 또한 3년 정도이다. 결국 우리 회사를 다니는 그 누구든지 모아이 석상처럼 한 자리에 가만히 남아있을 수 없다. 직장에서 잘리는 것도 아닌데 무슨 호들갑이냐고 묻는다면 굳이 이 팀을 떠나서 가고 싶은 부서가 없어서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자네는 그저 몸을 사리고 편한 부서에서 놀고먹고 싶은 거군!'


위 문장을 읽고 발끈했을 홍보팀 독자 여러분이 있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설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이에 대한 반론은 다음 편 글에서 하려고 한다. 옮기고 싶은 다른 부서가 없다는 말은 홍보팀이 마음에 든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다. 다른 팀 직원들의 입장에서 홍보팀은 일이 편하고, 이미지가 좋다는 두 가지 이유로 선호도가 높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은근히 '저는 홍보팀에서 일하고 있어요.'라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어 좋은가보다. 정확히 그것이 어떤 이미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론 담당도 해본 나로서는 기자들을 상대하는 홍보팀 직원을 보면 왠지 측은한 마음이 앞선다.(언론사에 어떤 안 좋은 감정은 없다.)


홍보팀에 남고 싶은 이유는 이곳의 업무가 우리 회사의 모든 직무를 통틀어서 가장 자유도가 높기 때문이다.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자유. '요즘 MZ세대는 이렇다.'는 이유에 약간의 자기 의견을 곁들여 상사를 설득하는 게 용인되는 업무 특성. 직무 역량 계발을 핑계로 나 자신의 발전을 꾀할 수 있는 쏠쏠한 보람. 입사 8년 차이자 홍보팀 업무 3년 차인 내가 발견한 이 팀만의 장점이다. 운 좋게 우리끼리 독점하고 있는 좋은 점을 포기해야 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유한함을 깨달았을 때 인생의 모든 것이 갑자기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한다.


"오 내일부터 정말 하루하루 감사하며 다녀야겠네요."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는 나에게 후배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답장했다. "엄청나게 열정적이시네요.." 그게 이 날 후배와의 마지막 카톡 대화였다.


KakaoTalk_20210718_235554180.jpg E9-5번 서가와 E1-1번 서가에서 골라서 사온 세 권의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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