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틀막 주의) 2주 만에 답장한 폐급 사원 썰 풉니다.
띠링! 문자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ㅇㅇㅇ.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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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인하기(무료 거부) 00#$$%"
모르는 번호로 온 메시지의 80%는 이런 스팸문자다. 어쩌다 이리도 혐오스러운 문자메시지를 화수분처럼 쏟아내는 전화번호를 물려받게 된 걸까.
010-XXXX-1XX0. 지금까지 사용한 전화번호 중에 역대급으로 지저분한 번호다. 회사 업무용으로 쓰려고 번호를 변경하고 몇 달 동안은 전 사용자의 인수인계 과정을 거쳐야 했다.
띠링!
"김ㅇㅇ님의 결제내역 169,000원 / 롯데김해아울렛"
'이 사람은 결제내역 문자가 안 온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로 둔감한 건가..'
한 번은 경찰공무원학원에서 수강료 독촉 문자가 오기도 했다. 언젠가 퇴근길에는 모 대학 교수님이 갑자기 "나 ㅇ교순데 요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냐"라고 볼멘소리로 연락을 주시기도 했다. 몇 개월 가량의 인수인계가 끝난 후 잠잠해지나 싶더니 이번엔 불법 도박사이트 스팸 문자가 꾸준히 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이 사람, 경찰공무원학원 수강생 아니었나. 정말 가지가지한다.' 전 주인의 현재 번호를 알 수만 있다면 통화해서 제발 사용처마다 개인정보를 변경해달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에 전화 공포증마저 사라질 지경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인해 더 이상 오늘은 어떤 광고 문자가 왔을까 일일이 확인하는 데에 소중한 시간을 쓰지 않고 있다. 모르는 번호로 문자메시지가 와도 보지 않는다. 읽지 않는다. '중요하면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걸겠지. 정말 긴급한 일이면 전화를 하겠지.'
스마트폰 알림음과 진동에 한 번씩 주의를 빼앗기고 마음을 쓸 때마다 집중력은 낮아지고 일의 흐름이 끊기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아예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아도 회사생활을 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하루, 3일, 일주일 이상 문자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굳은 심지로 문자메시지 아이콘 위에 알림 숫자를 쌓아두던 어느 날. 일요일이 되어서야 문자를 확인해볼 마음이 생겼다. 이것도 스팸, 이것도 광고.. 하나씩 삭제하던 중에 무언가 심상치 않은 문자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조ㅇㅇ님이 롯데시네마 관람권 기프티콘을 보내셨습니다.
▶상품명 : 영화관람권 번호 lc-00847612(롯데시네마 앱에 입력하여 사용)"
(기억을 더듬어보면 대략 이런 식의 내용이었다.)
'이게 뭐지?' 영화관람권 관련 문자가 2개. 손가락을 움직여서 화면을 가장 위로 올려보았다. 거기엔 약 2주 전에 도착한 아래와 같은 메시지가 있었다.
"심 과장~ 이번에 글을 아주 잘 써줘서 고맙습니다. ^^ 수고했습니다. 영화관람권 2매 보냅니다."
글을 읽던 나는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발신인은 대략 4시간쯤 지난 뒤에 마지막 문자를 아래와 같이 남겼다.
"롯데시네마 어플에 관람권 번호 입력해서 사용하면 됩니다."
발신인이 남긴 마지막 연락이었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이사장님이었다. 신세계그룹으로 치면 평사원이 정용진 부회장이 보낸 선물 메시지를 씹은 것과 같다. 몇 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어서 의아한 정용진 부회장이 보낸 두 번째 문자도 씹는다. 그 후 약 14일이 지나고 모든 상황을 깨닫는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선물을 보내신 칭찬과 감사의 뜻에 감동하는 시간은 채 1초를 넘기지 않았다. 석고대죄를 해야 하는 대역죄인이 되었다. “아이고 이사장님 죄송합니다..”
그동안 문자메시지에 답장하지 못한 이유를 6하 원칙에 맞게 장문으로 담아 이사장님께 다섯 통 보냈다. 이사장님은 답이 없었다. '직원 나부랭이인 내가 2주 동안이나 문자를 씹은 건데, 이 정도면 직원이 아니라 대통령이었어도 서운할만한 일이 아닐까..'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화창한 초여름 하늘이 갑자기 황사 소나기라도 내리려는 듯 노래졌다. 그다음은 부서에서 가장 직위가 높으신 분인 실장님께 길고 긴 카톡 메시지를 대여섯 통 써서 보내드리고 싹싹 빌었다. 전후 사정을 파악하신 실장님은 이사장님 문자에 제때 대답하지 않은 건 실례일 수 있지만, 결국 늦게라도 장문의 문자에 진심을 담아 보냈으니 그렇게 큰 실례를 한 건 아닐 거라고 다독여주셨다.
아무리 광고 문자가 싫어도 그렇지. 보통 회사로 치면 회장님이신 분의 연락을 어떻게 2주 동안이나 '안읽씹'할 정도로 사람이 둔감할 수 있냐고 누군가는 묻고 싶을 것이다.
변명하자면, 나는 KT 통신사에서 안드로이드 폰을 사용하면 신청할 수 있는 '투폰 서비스'를 2년째 이용하고 있었다. 투폰 서비스를 신청하면 한 대의 전화기로 2개의 전화번호를 쓸 수 있다. 서비스에 가입하면 스마트폰 오른쪽 상단에 ①번과 ②번으로 숫자가 표시된다. 1번 화면에서 상단의 2번 동그라미를 누르면 회사 용인 2번째 번호로 화면이 바뀐다. 여기서 공적인 용도로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럼 카카오톡은? 1번 화면에서 '듀얼 메신저' 앱을 설치함으로써 개인 화면에서도 회사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카톡이 문자를 대체한 시대니까. 회사 번호로 전화할 때에만 2번 화면으로 전환하다 보니 거의 개인용으로 쓰는 1번 화면을 벗어날 일이 없었다. 대부분 연락은 사무실 전화와 카카오톡으로 해결이 되었기 때문이다. 가끔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해야 할 때에만 2번을 꾹 눌러서 몇 초간 기다리면 되었다. 이러다 보니 문자 메시지 보관함은 점점 광고성 스팸문자만 쌓이는 공간으로 전락해버렸다.
이런 와중에 요즘 설마 누가, 그것도 이사장님이 중요한 연락과 기프티콘을 SMS 메시지로 주실지는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동안 귀찮음을 무릅쓰고 두 번호 살림을 유지해온 이유는 회사 사람들로부터 SNS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사회초년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사생활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가령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바꾸면 누군가는 반드시 지난 주말에 무엇을 했는지 유추하며 질문을 던졌다. 그때는 그게 그렇게 싫었다. 그럼 프로필 사진을 바꾸지 않으면 되지 않냐고? 친구 추가와 자동 추천을 막아놔도 집요하게 회사 및 거래처 사람과 나를 이어주는 SNS 알고리즘에 환멸을 느낀 이유가 가장 컸다. 철저히 회사에서 자유로운 인간관계를 원했건만, 알고리즘은 혹시 외롭지 않을까 귀신같이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람을 찾아서 보여줬다. 그렇다 함은 저들에게도 내가 보인다는 것인데..?!
가끔은 2개 번호를 운용하는 동안에도 잠깐 방심해서 개인 번호로 회사 연락에 답장한다든지 하는 통에 조금씩 숨기고 싶은 비밀이 드러나기도 했다. 회사 사람에게 들키는 날에는 그날로 개인 번호를 바꿨다.
더군다나 지극히 내성적인 현실의 나와, SNS에서 운동 계정으로 3천 명의 팔로워와 교류했던 제2의 자아 간에 갭이 현격할수록 피로감도 커졌다. 급기야 회사 메신저에서 갑자기 운동 루틴을 물어보는 선배의 연락을 받은 날. 오랜 시간 고민 끝에 SNS 계정을 지우기에 이르렀다. 며칠 뒤 KT플라자에서 개인용 전화번호를 또다시 바꿔버렸다.
지속되는 관심이 못 견디게 부담스러웠던 건 아니었다. 내가 무슨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도 아니고 팔로워 3천 명이야 미미하기 짝이 없는 영향력이다만, 무슨 짓을 해도 완전히 사생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괴이한 시스템에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이후로도 번호를 손바닥 뒤집듯 바꾸거나 숨고 도망 다니며 지냈다. 투폰 서비스를 이용하는 동안은 사생활을 계속 보장받으면서도 폰은 1대이므로, 번호를 2개 쓰는 티를 내지 않아도 되어 좋았다.
일과 중에 회사용 화면으로 항상 바꿔놓지 않아도 그럭저럭 생활이 된다. 메신저와 통화내역에서 회사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니 워라밸도 심리적으로 명확히 구분이 되었다. 그놈의 워라밸 타령을 하며 평화에 젖어있다가 결국 이 사달이 나버린 것이다.
몇 번의 사건을 경험한 뒤, 깔끔하게 투폰 서비스를 해지하고 안드로이드에서 애플로 넘어가기로 결심했다. 회사에는 스팸 문자가 많이 오는 불편함을 설명드리고 휴대전화 번호를 바꿔도 되는지 양해를 구했다. 부모님께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상의드렸다. 마침내 며칠 전, 길고 긴 2년 여의 도피생활을 마치고 연락처를 하나로 합쳤다.
SNS에서 나를 발견할 회사 사람의 관심이 여전히 두렵다. 물론 SNS 활동이 발각된다고 한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다. 이제는 아무래도 SNS 활동과 직장생활의 결이 맞는다고 생각하기에 보여도 상관없다는 마음이다.('예, 실장님 팀장님. 여기 맞습니다.')
게다가 고맙게도 카카오에서 '카카오톡 멀티 프로필' 기능을 훌륭히 개발해준 덕분에 공적인 프로필과 사적인 프로필을 전화번호를 2개나 쓰지 않고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살면서 한 번도 양다리를 걸쳐보거나 바람을 피운 적은 없음에도 어쩐지 무척 후련한 기분이 든다. 개인사적 관점에서 큰 일이라 생각해서 셀프 선물로 애플 워치도 장만했다. 이제는 이사장님 문자부터 실장님은 물론 팀장님 선배님 후배님까지 어떤 연락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세상에는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