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도 알리려면 뭐라도 해야지
넷플릭스 드라마 DP의 배경이 아니라 군대가 아니라 회사였다면 어땠을까. 영업사원은 "뭐라도 팔려면 아무라도 만나야지."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가방을 집어 들었을 것이다. 우리 같은 홍보마케터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올해 딱 탈영병 10명만 잡자는 임지섭 대위의 대사처럼 상사도 정확한 수치로 성과를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현시대 가장 인기 있는 매체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마케터는 더욱이 숫자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밖에 없다. 어쩌다 나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는 매체에서 4천만 채널(김범휴, 2020) 중 하나를 꾸려나가면서 밥값을 해야 하는 일을 하게 된 걸까?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 단체전 금메달.. 역시 세계 1위!' 7월 말 도쿄올림픽이 한창이던 시기에 포털사이트 뉴스 헤드라인을 이 남자들이 도배하기 시작했다. '이야 역시 대단하다. 김ㅇㅇ, 구△△ 선수!' 이탈리아를 결승에서 가볍게 이기고 표효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며 느낀 뿌듯함도 잠시. 다음날 평화롭던 홍보팀은 비상이 걸렸다. 올림픽에서 세계 정상에 오른 선수들이 회사 스포츠단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어벤저스에 빗대어 영웅이라 불리는 선수들의 활약을 기회로 '우리 회사'를 알리자는 주문이 내려왔다. 승리의 기쁨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선수를 보고 감동받았던 내가 반대로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홍보팀 3년 차, 유튜브 채널 운영 업무를 맡을지는 1년도 안 된 시한부 홍보마케터라는 경력은 변명에 불과하다. 그보다 더욱 큰 근심은 공공기관인 회사 유튜브 채널 구독자수가 1천 명이 되지 않아 존재감이 극히 미약하다는 데 있었다. 어떤 아이디어와 기획으로 인기채널의 바다와도 같은 이곳에서 돋보일 수 있는가. 게다가 아이디어를 생각할만한 여유는 전자레인지에 김밥을 넣고 데워지길 기다리는 시간만큼 짧았다. 위에서는 그럴싸한 기획을 기다리고 있다. 선수들을 훈련시키는 감독님께 연락드려보니 이미 방송국에서 출연 요청이 빗발치고 있다고 했다. 공항 귀국 인터뷰는 언론사에 밀려서 어림도 없다. '유퀴즈'만 빼고 모든 예능 프로그램 일정이 이미 잡힌 상황에서 어떻게 일개 회사 홍보팀에서 더 나은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을까?
홍보 마케팅 세계에서 어제 갓 입대한 이등병인 나는 점심을 대충 때우고 '소총'처럼 소중한 노트북과 전자 연초를 챙겨서 사무실 앞 카페에 갔다. 일단 인터뷰는 기본이다. 다만 언론사에서 프로들이 언급한 질문은 절묘하게 빗겨나가야 한다. 이미 본 인터뷰 질문과는 뭐라도 달라야 주목할 가치가 있다. 같은 인터뷰라도 다른 데서는 듣지 못했던 선수들의 개인사나 도쿄올림픽 비하인드 스토리를 끌어낼 수 있도록 질문지를 짜 보기로 했다.
그다음은 무엇을 기획해야 하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려면 뻔해서는 안 된다. 의외성이 있어야 하되 맥락이 없어도 곤란하다. 뻑뻑한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덕지덕지 처발라서 입에 욱여넣고 카페인을 수혈 중인 나를 실장님이 발견하고 말했다. "너 밥은 먹었어? 얘는 점심시간에도 이렇게 일해~" 한 마디를 팀장님들께 던지시고 지나갔다.
팀에서 맏형인 선수가 4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컴백해서 이룬 승리에 사람들은 감동했다. 이 선수와 단짝인 다른 선수는 'ㅇㅇ이형'을 2024 파리 올림픽에 데려가겠다고 밝힌 귀국 기자회견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올림픽은 프랑스에서 열린다. 프랑스는 펜싱의 종주국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종주국의 펜싱협회에서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광선검(lightsaber)을 정식 종목으로 인정했다는 점이다. 아직 올림픽 정식종목이 아님에도 어쩌면 다음 올림픽에서 각 국 선수들이 어두운 경기장에서 광선검을 휘두르는 장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공상을 이어나갔다.
도쿄 올림픽의 승리를 축하하는 갈라쇼의 의미에 다음 올림픽 도전을 공언하는 의미로 세계 최정상급 선수인 두 명이 광선검 대결을 펼치면 어떨까? 의외성에 의미를 담는다면 정말 어쩌면 스포츠 기자들과 해외 스타워즈 팬들의 주목을 받아 한국관광공사의 'Feel the Rhythm of Korea'처럼 대박 영상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느꼈다. 기획안 보고 결과는 합격. 실무자 외에 마땅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미달 합격'인 셈이었다. 오피스 블랙코미디처럼 아이디어를 꺼낸 사람이 결과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정말로 와버렸다.
귀국하자마자 거의 모든 예능프로그램을 섭렵하는 동시에 국가대표 선발을 위한 대회에 출전해야 하는 선수 입장에서 회사의 요청은 귀찮은 게 당연하다. 공공기관 유튜브에 출연하는 직원에게 인센티브를 줄 수 있는 방법이 없기에 귀찮은 부수적 업무의 연장선으로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부탁하는 나로서도 괴롭다. 미안함과 고마움은 어디까지나 마음일 뿐, 실물이 아니지 않은가..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하는 선수들을 강원도 홍천군까지 쫓아가서 밤늦게 주어진 단 2시간 동안 영상을 찍어왔다. 줄 수 있는 건 존경심(?) 뿐인 상황에서 장소를 섭외하고 촬영 일자를 잡고 외주 촬영팀에 편집을 재촉하는 동안 10년은 늙은 느낌이 들었다. 불과 한 두 달 여의 시간이지만 그 이상의 경험치를 쌓았길 바라며, 그렇게 이 영상이 탄생했다. 여담으로 두 선수는 극도로 피곤한 상황에서도 젠틀하고 협조적으로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아이디어 도출, 기획안 작성, 상급자 보고, 출연자 섭외, 장소 섭외, 촬영 안 구체화, 영상 편집, 제목과 썸네일 고민, 본문 작성을 거쳐 위의 영상을 마침내 업로드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스포츠 및 연예뉴스 언론사에서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회사 차원에서 보도자료를 내는 것도 검토했으나, 명분이 부족했다. 언론 기사화할 만큼의 당위성이 부족했다는 점이 이번 기획의 아쉬움이다. 그러나 유튜브 조회수란 언론의 조명을 받아서 올라간다기보다는 그 반대의 사례가 더 많다. 한국관광공사의 두 번째 히트작인 충남 서산 '머드 맥스'는 거의 업데이트와 동시에 모든 커뮤니티에 유저들이 자발적으로 글을 올리면서 바이럴 홍보에 성공했다.
<내게 명예로운 죽음을 선사해준 한국관광공사의 머드 맥스>
나름 직장생활 처음으로 그럴듯한 이슈 영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 기대한 내가 너무 순수했던 걸까 싶다. 만화가 이말년의 '명예로운 죽음론'이 생각난다.
영화 '패션왕'이 망한 기안 84에게 이말년은 '인터스텔라 없었어도 망했을 영환데 인터스텔라 때문에 망한 것처럼 만들어 줬다'라고 말하며, 이를 '명예로운 죽음'이라 칭한다. '광선검 대결' 영상을 올린 정확히 그 시점에 맞춰서 한국관광공사가 머드 맥스를 올렸다. 직장 동료에게 나도 앞으로 한국관광공사가 있는 강원도 원주를 향해 감사의 의미로 하루 세 번 절하겠다고 웃픈 농담을 했다.
홍보 영상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혔을 때? 홍보마케터인 나는 마케터 본인이 영상을 포기했을 때 죽는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홍보가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우리 회사를 알리는 거라면, 마케팅은 콘텐츠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며 그들의 니즈를 충족시켜주는 데에 의미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식빵 언니' 김연경 선수처럼 굳건한 팬층까지는 아니어도 우리 선수들을 방송사에서 모셔간다는 건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
팬들이 어디 제일 많이 모여있는지 생각했다. 특이하게도 선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외우다시피 하며 중계하는 팬들은 트위터에 모여 있었다. 회사 트위터 계정이 없으므로 아쉬운 대로 개인 계정에 영상을 gif 움짤로 만들어서 올리고 반응을 지켜봤다. 관심은 보였으나, 트위터 팬 분 중에 영향력이 막대한 인플루언서는 없었다. 여기서 끝인가?
답은 의외로 가장 평범한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두 선수의 팬은 그들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모두 모여있었다. 맏형인 A선수는 팔로워 3만 2600명, 훤칠한 외모의 B선수는 팔로워 5만 7900명을 보유한 인플루언서들이었다. 이번 홍보영상을 알리는 여정의 마지막 퍼즐은 선수 본인들을 통한 홍보라는 확신이 들었다.
바쁜 활동으로 요즘 집에 들어갈 시간조차 없다는 선수들에 대한 미안함 한 보따리, 실적을 기대하고 계실 상사분들에 대한 부담감을 한 트럭 안고 선수들의 훈련장을 찾아갔다. 촬영장에서의 멋진 모습을 인화한 사진과 동네 빵집에서 산 롤케이크를 들고. 물론 모든 경비는 자비로 부담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도와준 데에 대한 개인적인 고마움 때문이었다. 선수들이 각자 인스타그램에 올린 게시물은 '노는 브로' 촬영 게시물의 인기를 뛰어넘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실은 이마저도 실패할 뻔했다. 처음에 선수들에게 이미지 하단에 회사 로고와 유튜브 채널명을 넣어서 부탁했다가 답신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피드 게시를 부탁하려면 그 사람이 올리고 싶은, 그의 퍼스널 브랜드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플러스가 될만한 이미지를 줘야 한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역지사지의 교훈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예 및 스포츠 언론사에서는 우리 영상을 기사화하지 않았다. 선수들의 SNS를 눈팅하며 글을 쓰는 기자들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이 점이 두 번째로 아쉽다. 여기서 끝인가?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을 나름대로 편집해서 짧은 동영상으로 만들었다. 회사 유튜브 쇼츠(Shorts)와 틱톡에 올렸다. 점점 주의력이 줄어들고 간단한 영상에 주목하는 트렌드에 맞게 유튜브가 혹여나 '떡상'을 시켜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서다. 이 역시 로또 복권을 사는 심정으로 해본 일이었으나 당첨은 되지 않았다. 그동안의 모든 노력을 정리하는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누군가가 우연찮게 발견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공유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뭐라도 바꾸려면 뭐라도 해야지.." 넷플릭스 드라마 DP의 마지막 장면처럼 지난 몇 주간의 나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모니터를 응시하며 고민하고 고뇌했다. 홍보를 위해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경우의 수를 실행했음에도 결핍을 느낀다. 세계 최정상급 선수라는 훌륭한 인물들로 '겨우 이것밖에 기획하고 만들지 못했나'하는 자책감도 느낀다. 요리로 치면 본인은 맛있다고 만족하지만, 제주 앞바다에서 잡아 올린 싱싱한 해물로 라면을 끓여 먹는 결과를 얻은 건 아닐까?
다음번에 기회를 얻는다면 선수와 팬분들을 더욱 기쁘게 하면서 우리 회사도 알리는 부수적 효과를 얻는 대어를 낚고 싶다. 넥스트 관광공사, 우리 업계에서의 'Feel the Rhythm of Korea'를 기획하는 꿈을 꾸며 금요일 출근을 준비한다.
지난 글 업데이트 이후 근 한 달간 아무 글도 올릴 수 없었던 이유. 잠이 너무나 달콤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빴기 때문입니다. 이게 다 도쿄올림픽 때문입니다. 아니, 홍보 아이템을 미리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은 저의 업보입니다. :) 시한부 홍보마케터의 업무일지는 계속됩니다.
▶ 시한부 홍보마케터의 업무일지 지난화 보기
https://brunch.co.kr/@sardine/50
수치 인용 출처 : '유튜브 마케팅의 정석', p.14, 2020, 더퀘스트
커버 이미지 출처 : ⓒ 넷플릭스 'D.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