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그대로인데 배울 일은 늘어만 갑니다
유년기 때 하루가 다르게 키가 자랄 때의 느낌이 기억나는가? 사람의 성장은 퍼센티지가 표시되는 그래프처럼 직관적으로 알 수 없다. 가족은 물론 본인도 어느 순간 짧아진 소매와 바지 기장을 보며 자랐다고 깨닫는 식이다. 매일 자신의 모습을 거울 속에서 본다. 한 지붕 아래에서 늘 보는 가족도 변화에 둔감하다.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명절이나 일가친척이 모일 일이 있으면 그제야 친척 아저씨가 보고 "어이구 너 언제 이렇게 컸냐!"라며 놀란다. 회사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도 조직 안에 늘 있는 직원은 좀처럼 실감하기 어렵다.
입사 8년 차 직원인 내 기준으로 봤을 때 처음의 우리 회사 홍보팀은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언론 홍보에 집중하던 아날로그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신입사원 시절 나는 사업부서에 있었기 때문에 팀장님의 "보도자료 챙겼어?" 말씀에 불과 하루 전에 언론 담당 선배한테 전화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보도자료 좀 내달라고 부탁하다가 불호령을 듣기 일쑤였다. 지금 생각하면 욕을 바가지로 먹어도 할 말이 없다. 초안은 괴발개발에 문장 구조나 호응이 엉망진창이었다. 죄송하다고 가서 빌면 선배는 문장력을 기르라며 소설가 김훈의 남한산성 같은 책을 많이 읽으라고 호통 끝에 나지막이 말하곤 했다.
김훈의 남한산성. 입사 후 8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나는 박경리나 김훈 같은 대가들의 책을 읽지 않았다. 현생에 치이는데 언제 그 두꺼운 책을 읽을 수 있는가. 어쨌든 글을 잘 써야 한다. 당시 내가 본 홍보팀 업무 한 축이 언론 홍보였다면, 다른 한 편에는 사보 발행과 CEO(우리 회사는 이사장이라고 부른다) 스피치를 쓰는 선배들이 있었다. 줄담배를 하고 화장실이 있는 복도에서 언제나 "카아악!" 하는 듣기 괴로운 가래 끓는 소리를 내던 연세 지긋한 '선생님'이 골똘히 고민하며 연륜이 느껴지는 글을 썼다. 언론사 기자들을 상대하는 기 센 선배, 문서 더미를 책상 위에 늘어놓고 글을 쓰는 선배들 외에 사진과 영상 촬영을 담당하는 선배들이 있었다.
지금과 비교해서 생각하면 중요도가 역전된 느낌이다. 회사에 CEO가 참석하는 행사가 있을 때 그분의 화보를 찍고 행사 스케치 영상을 남기던 사람들은 이제 회사 매거진과 유튜브 채널 콘텐츠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태초에 "SNS가 대세라던데 우리도 해야 하지 않겠어?"라는 말씀이 있었다. 그러자 회사 공식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네이버 블로그가 탄생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요즘 유튜브가 대세라던데."라는 말씀이 있었다. 영상 담당 선배 혼자서 기록 영상을 올리던 유튜브는 다음 해부터 성과관리대상에 포함되는 공식 채널로 바뀌었다. 가장 최근에는 "요즘 틱톡이 그렇게 인기라더라"라는 말씀이 있었다. 얼마 후 갑자기 회사 공식 틱톡 계정이 탄생했다. 이 모든 게 불과 몇 년 사이 일어난 일이다.
문제는 중요도가 역전되는 동안 회사의 업무 단위와 인력 구성은 큰 변화가 없었다는 거다. SNS가 아무리 대세라 한들 회사의 눈으로 보는 홍보의 성공 여부에는 언제나 '언론'이 있었다. 아침에 배달되는 신문지를 펼쳤을 때 그 안에 우리 회사의 기사가 작게라도 있냐 없냐가 중요했다. 많이 봐줘서 온라인 뉴스라도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SNS는 아무래도 '요즘 애들이 스마트폰으로 그렇게 뭘 본다던데' 정도로 치부되는 요즘 것들의 매체였다. 젊은 애들이 많이 하는 채널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막내 또는 젊은 직원의 몫이 되었다. 전통매체보다 많이 보는 SNS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SNS 담당' 직원은 여전히 1명. 지금 막내 직원은 5개 채널을 대행사를 두고 혼자 관리·감독하고 있다.
대행사가 있다 해도, 팔로워와 인기는 돈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취미로 네이버 블로그나 인스타그램 계정을 운영해본 사람은 계정을 키우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안다. 하물며 각 잡고 회사 계정을 관리하는 어려움이란 얼마나 클까. 내 업무가 아니라 다행이다. 막내 직원이라 말은 못 하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다섯 가지 채널을 혼자 관리하는 콘텐츠 마케터가 어디 있나요?'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SNS 홍보가 아니라 마케터라고 표현했다. 유료로 물건과 서비스를 판매하는 일만 하지 않을 뿐 공공기관도 분명히 마케팅을 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홍보'라는 단어에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모두 담기는 역부족이다. 홍보는 회사를 알리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쌓고 외부와 좋은 관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그럼 마케팅은? 책 '퀀텀 마케팅'을 쓴 마스터카드의 마케팅 및 커뮤니케이션 최고책임자(CMO) 라자 라자만나르는 말한다.
기업에서는 대개 마케팅과 커뮤니케이션 혹은 PR이 결합된 경우가 많다. 사실상 이들은 단일한 연속선상에 있다. - 라자 라자만나르, p. 67, 퀀텀 마케팅(2021)
PR 개념의 업무가 전부였던 홍보팀은 어느새 친척 아저씨를 깜짝 놀라게 하는 무서운 조카로 성장해버렸다.(어이구 너 언제 이렇게 '업무'만 자랐냐!) 있는 듯 없는 듯 제 몫을 다하던 회사가 점점 대중이 체험하는 사업을 하나둘 씩 벌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가 이렇게 좋은 회사입니다'라고 알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보다 대중이 우리 회사와 사업, 서비스를 좋게 생각하게끔 만들고 다가오게 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광고도 신경 써서 만드는 한편, 브랜딩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회사에 공식적으로 마케팅팀이란 부서가 없으니 표현하기가 영 이상하지만 이런 업무들이 마케팅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엄밀히는 커버해야 하는 업무의 범위가 늘어난 거지 우리의 업무능력도 그에 맞게 발전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예전에는 회사 내부 직원 간에만 언론 홍보에 의미를 부여하는 홍보를 하던 우물 안 개구리였다면, 이제는 우물이 수로가 되더니 운하가 된 광경을 보는 것 같다. 노는 물이 커졌고 더 이상 우리만의 수영장이 아니다.
오늘날 종이신문을 보는 사람은 희귀종이다. 온라인 뉴스도 순위권만 살아남는다. 스마트폰 이용자는 하루 평균 3,000개에서 5,000개의 광고를 본다. 집에 TV가 없거나, 있어도 보지 않는 사람이 늘어난다. 방송국이 유튜브 속으로 들어갔다. 백만 구독자가 따르는 크리에이터들이 사용자들의 주의력과 시간을 흰 수염고래처럼 쓸어 담는다. 인스타그램에서는 잘나고 멋지고 아름다운 모델들과 사진 하나 올리는 데 억 소리 나는 돈을 받는 인플루언서들에게 하트와 댓글이 쏟아진다. 유명 배우가 팀 단위로 기획하고 올리는 틱톡 영상이 커뮤니티를 순회하며 파도타기 한다. 그야말로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전장에서 홍보마케터는 깨닫는다. 자신은 이 바다에서 플랑크톤 아니면 크릴새우, 많이 쳐줘서 정어리 정도의 존재라는 사실을.
그 사이 시간은 무섭도록 빨리 지나간다. 모처럼 대체 공휴일인 8월 16일 카페에서 이 글을 쓰는 사이에도 시한부 홍보마케터의 시간은 이제 138일 정도 남았다. 만약 다음번 인사 때 직무순환제의 순리대로 다른 팀으로 발령이 난다면 내 자리에는 누가 올까? 그 사람은 직전 부서에서 감사 업무를 하던 사람일 수도 있다. 아니면 일선 사업부서에서 사무행정 업무를 하던 사람일 수도 있다. 누가 홍보팀에 오든지 매트릭스의 빨간약을 먹으면 무서운 현실을 마주할 것이다. 어쩌면 "아 잠깐만, 잠시만요. 잘못 생각했습니다 제가."라고 말하고 입을 헹군 다음 다시 파란 약을 삼킬지도 모른다.(깨어나세요, 마케터여!)
조직과 시스템을 탓하기에는 답이 없다. 마케팅팀이 따로 없는 회사의 정어리 홍보맨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 나는 우리 회사의 몇 번째 홍보마케터일까. 어차피 이상하고 어려운 홍보와 마케팅의 현실을 마주한 사람이든 누구나 두려움을 느낀다. 제1의 아해도 무섭다고 한다. 제2의 아해도 무섭다고 한다. 아는 만큼 보이려니 생각하는 장님의 심정으로 통장 잔고를 확인해본다. 아무래도 얼마 전에 들어온 소소한 성과급을 긁어모아서 마케팅 강의를 결제해야겠다.
P.S - 마케팅을 하는 사람은 마케터라고 부르면 되는데 홍보는 '홍보맨' 말고 도무지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홍보맨' + '여성'을 검색했더니 뉴스 기사에도 '여성 홍보맨 전진 배치'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게 영 어색하다. 심지어 모 여성 아나운서도 자신을 '아나운서 출신 홍보맨'이라 소개한다. 내가 아는 man은 남자인데. 어학사전 2번 뜻인 '인류'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되나. 히어로 이름 같기도 하다. '-er'을 붙여서 '홍보러', '홍보 휴먼', '홍보 피플'이라고 할 수도 없고. 충주시 홍보맨이 여성 공무원이었다면 그도 홍보맨이라고 불렀을까 궁금하다.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케팅팀 없는 회사의 정어리 내성적인 마케터 정어리입니다. 답이 없는 세상에서 잘 산다는 건 뭘까 고민합니다. 기획, 마케팅, 심리 인사이트를 찾아 오늘도 헤엄치고 있습니다. 아래 카카오톡 채널을 추가해주시면 제가 뭐하는 사람인지 한 꺼풀 벗겨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 뒤늦게 모든 SNS 계정을 통일하려고 필명을 여러 번 바꾸고 있어요. 9월 초에는 이름과 주소, 채널명을 '정어리'로 통일할 계획입니다. 브런치 주소도 바꿀 거예요.
* <시한부 홍보마케터의 업무일지> 지난 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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