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브랜딩을 하지 않으면 일어나는 일
회식을 하고 알코올 때문에 분별력이 약해지면 편의점 금단의 진열대에 손을 댈 때가 있다. 수입 아이스크림 코너에서 매그넘 초콜릿 바를 사 먹고 뒤늦게 가격에 놀란 경험이 있다. 영수증에 찍힌 가격보다 더 놀라운 건 매그넘(Magnum) 아이스크림을 생활용품으로 유명한 유니레버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매그넘을 비누 브랜드 도브(Dove)나 데오드란트 브랜드 엑스(Axe)와 같은 라인에서 생산했을 리가 없음에도 의외다. 젖소와 쿠키 그림 하면 생각나는 벤앤제리스(BEN&JERRY'S)도 그렇다. 액체세제 퍼실(Persil)을 만드는 회사에서 이 맛있는 걸 만들었다고? 갭 차이에 이질감이 든다.
이 회사 도대체 뭐지? 유니레버가 2007년에 제품을 400개로 축소 조정하기 전에는 브랜드가 무려 1600개에 달했었다고 한다. 유튜브에서 '고영경 교수의 말랑말랑 세계사'를 보고 알게 된 이 문어발 브랜드를 회사 실장님께 꼭 보여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장님, 우리 회사는 여기에 비하면 약과였어요."
요즘 사무실에서는 늘어나는 사업에 비해 제자리걸음인 회사 인지도가 고민이다. 사업이 문제가 아니라 회사가 유명하지 않다는 게 문제다. 처음에는 이게 고민할 만할 일인가 싶었다.
섬유유연제 다우니(Downey), 탈취 방향제 페브리즈(febreze), 팸퍼스(Pampers) 기저귀를 프로텍터 앤드 갬블(P&G)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모르는 게 뭐가 문제라는 걸까.
마찬가지로 우리 회사도 각각의 사업이 성장하면 됐지. 회사명은 궁금한 사람만 알아보면 그만이지 않은가? 소비재 생산기업이나 일반인 대상 서비스 기업이 아닌 공공기관 입장에서는 그럴만한 나름의 사정이 있다고 한다.
첫째, '사람들이 회사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회사가 좋은 일을 하고 사회에 기여한다는 걸 사람들이 얼마나 알아주는가?' 하는 문제가 회사 전체의 대외 평가와 연결된다.
둘째, 고객의 생활에 밀접한 제품이나 서비스가 없으므로 여러 가지 사업은 열심히 하는데 인지도가 없으면 티가 나지 않는다. 일한 티가 나는지의 문제는 다시 기관 평가로 이어진다. 임원의 체면도 걸려있다.
그나마 피부에 와닿는 물과 전기를 예로 들어서 생각해보자. 한국전력과 수자원공사가 평소에 얼마나 열일하든지간에 보통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두 회사를 떠올릴 일은 거의 없다.
대상을 돈으로 바꿔서 그럼 이번엔 국민연금공단을 생각해보자. 언젠가 충분히 늙으면 연금을 받는다는 사실 정도만 떠오른다. 오히려 연금이 고갈된다거나 '국민연금이 던져서 주가가 떨어졌다'는 뉴스가 화만 돋울 뿐이다.
공공기관과 공기업은 딱 이 정도의 이미지가 아닐까. 물과 공기, 전기처럼 누리는 게 당연하나 없으면 불편한 그런 존재. 지하철이 파업하면 불쾌지수가 높아진다. 그렇다고 지하철이 정상화되면 공사에 "지하철을 운행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감사일기에 적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나 회사가 아닌 신께 감사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차라리 우리 회사가 도브를 파는 유니레버처럼 비누라도 만들어서 팔았으면 좋겠다. "알려야 한다."라고 종이에 인쇄해서 파티션에 붙여놓고 싶다. 알리고 싶지만 좀처럼 쉽지 않다.
우리 회사도 큰 틀에서 보면 공공의 더 나은 삶에 기여하고 있다. 그러나 소비재 회사에 비해 우리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유니레버와 프록터 앤드 갬블의 제품은 보이고 만지고 느낄수도 있다. 비록 비누와 샴푸를 만든 회사까지는 사람들이 모를지언정 말이다. 고객의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요소가 부족하니 인지도가 낮은 건 당연하지도 모르겠다.
주말 동안 브랜딩에 관한 책을 서너 권 숨 가쁘게 읽으니 브랜드란 무엇이고 브랜딩이란 무엇인가 감이 조금 잡히는 것 같다. 결국 돌고 돌아 마케팅과 브랜딩의 기초적 격언을 마주한다.
"브랜딩이란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 혹자는 이를 브랜딩과 마케팅의 차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마케팅도 결국 내세우지 않아도 고객이 알아서 제품을 선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도 말한다.
자기 PR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공공기관은 이렇다 할 브랜드가 없다. 있다면 공공기관의 이름 정도가 아닐까. 사업과 서비스는 말 그대로 사업명을 그대로 옮겨 적은 이름을 사용한다. 브랜드라고 볼 수 없는 문자의 나열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이름을 알아달라는 식의 홍보를 계속한다.
다른 회사에서는 어떨지 모르겠다. 공공기관의 홍보에는 제품과 서비스가 없다. 만지고 느끼고 오감을 경험할 '무언가'가 없다 보니 마케팅이 없고 브랜딩이 없다. 하나라도 손에 잡히는 대고객 사업이 있으면 그 한 가지 사업만 집중해서 알리면 되지 않는가? 그러기엔 다양한 사업 중 하나에 불과하므로 홍보부서 입장에서는 다른 99개 사업을 알릴 본분을 저버리는 셈이다.
월요일에 출근해서 상사께 '브랜드가 400개인 유니레버도 막상 개별 브랜드의 제조사가 유니레버임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로 운을 떼 보았다. '사업을 아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회사 인지도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씀을 드려보았다. 뭔가 대단한 진리를 깨달은 현자처럼 실장님과 2시간 정도 회의를 했지만 답이 되지는 못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우리 회사를 평가하는 외부의 시선과 CEO 및 임원 분들의 관점은 조금 다른 것 같다. 정부 평가를 받는 기관 입장에서는 대중에게 알려진 제품이나 서비스가 없으니 일단 회사가 유명한 게 중요하다.(누구나 아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라면 인지도를 걱정할 일이 없지 않을까!) 인지도가 없을수록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거나 사업을 지속할 가치가 없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으므로. 어찌 보면 조직의 존속과도 직결된 문제다. 때문에 일단 회사를 알리는 홍보 활동도 병행할 수밖에 없다. 자화자찬을 들어주길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다.
"땡땡 공단? 거기는 하는 일이 뭔가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으니 일이 없군요.. 예산 삭감!" 설마 기획재정부 공무원이 이렇게 말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어쨌든 존재감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다시 고민해본다. 제품과 서비스로 마케팅을 할 여건이 되지 않는 조직에서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세 가지 방안을 생각해보았다.
1) 한국관광공사나 KCC처럼 유튜브 생태계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남기는 영상을 제작해서 유명해진다.
→ "오~ 이번에 저도 그 영상 유튜브에서 봤어요. 대박이던데요?"라는 평가를 들으면 홍보를 잘한 걸까? 회사 이름을 알리는 게 우리가 하는 사업에 어떤 도움이 되는 걸까?
2) 고객 및 잠재 고객이 온라인 세상에서 우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콘텐츠 홍보 마케팅을 열심히 한다. 1번처럼 대박 영상을 못 만들면 꾸준히라도 만들어 올린다.
→ 사업을 소재로 자랑만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은 없을 텐데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도 재미를 추구할 수 있을까?
3) 사업이 성장함에 따라 회사도 자연스럽게 알려질 수 있도록 개별 사업 대상 마케팅 분야로 홍보부서의 역할을 확장한다.
→ 직무 순환으로 몇 개월, 몇 년마다 물갈이를 하는 환경에서 이제 막 팀에 들어온 금붕어들이 "여긴 내 세상이다!" 라며 능숙하게 헤엄칠 수 있을까?(물론 나는 헤엄치려 노력하는 중이다.)
어느 포인트를 잡아서 알려야 할지 정하지 않는 한 유튜브 영상을 만들든지 SNS 게시물을 올리든지 항상 헤맬 수밖에 없다. 좋으나 싫으나 회사 자체를 알릴 수 있는 홍보·마케팅 활동은 필요하다. 그러나 와닿지 않는 홍보에 관심을 가져줄 사람은 없다. 공공기관이 자기 PR을 위해 홍보비를 펑펑 쓰는 모습도 좋게 보이지 않는다.
마케팅과 브랜딩의 중심에는 '고객'이 있어야 한다는데 우리는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있는 걸까? 공공기관 임직원과 외부 평가 관계자 모두가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다면 나는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늘 그랬듯이, 우리는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다.
▶ 시한부 홍보마케터의 업무일지 지난 화 보기
https://brunch.co.kr/@sardine/52
* 커버 이미지 출처 : 유니레버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