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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어리 Jan 01. 2022

올 가을에는 결혼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새해 덕담으로 결혼하란 말 들은 사람, 저뿐인가요?

"너도 올 가을 정도에는 결혼을 하지 그러냐?"


와우.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너도 올 가을에는 결혼했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기도 합니다. 


아버지께 2022년 새해 첫 덕담을 듣고 저는 세 가지 이유로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살 '집'이 없어서입니다. 회사와 가까운 서울시 송파구에서 원룸살이를 하는 저에게 올 가을에 입주할 아파트를 구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처음엔 '내 집이 없는데 결혼을 어떻게 하나?'라고 생각했는데요. 집이 준비되어 있어야만 배우자를 만날 수 있지 않냐는 자신감의 결여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전세살이로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많은 부부들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결국 돈이 자신감 아닌가요?(답을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 번째 이유는 바로 저와 '사귀는 사람'이 없기 때문인데요. 당장 만나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올 가을에 결혼을 하라는 것인지 저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보통 9월에서 11월까지를 가을이라 부르므로, 2022년 11월 30일 수요일까지 식을 올리는 게 가능한 일인가 싶습니다. 


웨딩 성수기는 3월에서 5월, 9월에서 11월까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데 결혼식장 성수기에 식을 올리라니요? 이미 늦었습니다 아버지…. 


결혼은커녕 누구를 어디서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다른 사람들은 6개월 전이나 그보다 먼저 식장을 예약하기도 한다는군요.


세 번째 이유는 가을에 결혼하라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보다 '집'을 먼저 떠올린 제 자신 때문이었어요. 


저는 옛날 게임 <스타크래프트>를 할 때에도 'show me the money' 치트키를 써서 미네랄과 가스를 빵빵하게 채우곤 했습니다. <심즈>를 했을 때에도 트레이너를 써서 돈을 무한으로 충전하고 넓은 집에 가구를 세팅해놓았죠. 게임에서마저 소액 벌이를 하며 먹고살아야 하는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아서요. 


현실에서도 기본적인 집이 있고 넉넉한 소득 수준을 갖춰야 결혼 상대자를 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저만의 착각일까요? 어쩌면 인생을 조금이라도 'easy 모드'로 살고 싶어서 '집' 핑계를 대는 게으르고 무른 생각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제까지 마음 편히 지내다가 갑자기 서울에 집을 마련할 생각에 여전히 결혼을 회피하는 저. 실은 사랑에 빠질만한 사람을 만나기도, 그리고 그 사람도 저를 좋아하는 기적을 실현하기가 내 집 마련보다 어려운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부터 결혼을 생각하지는 않지요. 결혼을 전제로 한 선 자리에 나가는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자연스러운 끌림이 관심으로, 관심이 호감으로, 호감이 사랑으로, 사랑이 결혼으로 발전하는 거 아니었나요? 


결혼부터 생각하며 인생의 짝을 찾는 일은 마치 뒤돌아서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것처럼 부자연스럽습니다.(어떻게 내려가야 하는지 상상해보셨나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 없는 결혼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오로지 소울 메이트를 찾아 사랑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커리어와 자산 모두 만족스러운 상태였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은 치트키나 트레이너 없이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부모님이 저를 영원히 기다려주시지 못하시는 것처럼 제한시간이 있다는 사실. 어쩌면 저에게 부족한 건 자산이나 커리어가 아니라 사람을 만날 자신감이라는 3가지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 새해 첫 덕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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