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취향>> 중에서
프랑크푸르트 역을 나와 오른쪽으로 한동안 걷다 보면, 어느새 현대적인 건물들은 사라지고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뢰머 광장(Römerberg)이 있는 구시가의 중심은 현대적이던 프랑크푸르트의 첫인상과는 많이 달랐다. 도시의 구시가에서 중후하게 멋스러운 외관이 마음에 들던 괴테 하우스(Goethe House)를 만났다. 괴테 하우스는 별 관심 없던 프랑크푸르트를 의미 있는 도시로 만들어준 공간이다. 괴테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괴테 관련 기념품이 즐비한 작은 상점 겸 서점이 보인다. 가방, 열쇠고리, 작가의 작품을 담은 책, 화보 등 다양한 기념품 중 작가의 초상이 그려진 엽서 몇 장을 골랐다. 비록 엽서지만 그렇게 괴테를 소유하며, 상점을 거쳐 입구를 지나 괴테 아트 갤러리와 괴테 하우스로 갔다. 멋진 표정의 괴테 두상이 맞이하는 공간에서 그의 묵직하고 여유 있는 표정을 마주했다.
괴테 관련 기사 스크랩과 그림을 지나 또 다른 문으로 나가면 아트 갤러리가 나오고, 갤러리를 지나 밖으로 나오면 푸른 하늘과 담쟁이 넝쿨이 반겨주는 예쁜 정원이 있다. 개인 주택에 딸린 정원치고는 규모가 꽤 크다. 정원 한쪽의 작고 귀여운 문을 조심스레 열어보니, 또 다른 정원에서 정원사들이 바쁘게 작업 중이다. 바쁜 와중에도 포토 스팟까지 알려주는 친절에 그곳이 한층 좋아졌다. 푸르름 가득한 정원 곳곳에는 담쟁이 넝쿨이 멋지게 올라 있다. 시골집에 아빠가 정성껏 심으셔서 지붕 위에 올린 능소화 넝쿨이 생각났다. 정원은 가꾸는 사람에 따라 빛이 나는 법이다. 괴테 하우스의 정원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정원을 지나자 내 유년 시절의 문학 영웅이 살던 저택인 괴테 하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지런하게 난 돌길을 밟고 정돈된 느낌의 집을 올려본다. 나의 유년과 그의 유년이 겹쳐진다. 아침만 해도 여행의 끝이 가까워 너무 아쉬웠는데, 그 작은 돌길을 밟고 선 순간 동경해오던 작가가 머무르고 성장한 곳에 왔다는 데 즐거움이 차오르며 우울함은 자취를 감췄다.
내부는 값지고 귀한 물건들로 고급스럽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괴테의 아버지는 황제 고문관이었는데, 가문의 재력과 영향력을 방증하는 것들이 많았다. 계단 난간에는 괴테 가문의 철자가 장식되어 있고, 복도에는 외국에서 수집한 그림, 당시에는 보기도 구하기도 힘들었던 첨단 시계, 동양 문양의 벽지 등 가문의 부와 권위를 잘 보여주고 있다.
1층은 벽지나 물건 색에 따라 노란 방, 파란 방, 빨간 방 등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따뜻한 느낌을 주는 노란 벽지에, 괴테 어머니가 아끼던 그의 초상화가 있는 ‘노란 방,’ 벽지와 의자, 벽에 걸린 그림까지 푸른빛을 띠고 있어 고상하고 압도적인 인상을 주는 ‘파란 방,’ 커튼과 의자의 천이 붉은색이고 괴테 하우스의 모든 방 중 가장 화려했던 ‘빨간 방,’ 세로로 긴 귀하고 값진 피아노와 천장의 바이올린 모양 장식이 인상적인 음악실 ‘회색 방’ 등이다.
2층은 괴테 하우스에서 볼거리가 가장 많은 공간으로, 방의 기능에 따라 구분되어 있다. 파란색 꽃무늬 벽지가 인상적인 괴테 여동생 코르넬리아의 방, 괴테가 태어났던 신비로운 분위기를 주는 탄생의 방, 아늑한 티룸 같은 ‘어머니의 방’이 있었다. 그 문 너머 보이는 ‘회화전시실’에는 괴테 집안이 아끼고 후원했던 작가들의 작품이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약간 어두운 조도가 회화작품들의 개성과 아름다움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고 있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곳은 회화전시실에 이어 갔던 ‘도서실’이다. ‘도서관’이라기에는 작은 규모의 개인 ‘도서실’로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 괴테와 여동생 코르넬리아가 책도 읽고 아버지 지도 아래 공부도 했던 곳이라는데, 그리 크지 않은 방 안에 책장이 여러 개 놓여 있고, 책장 가득 장서가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섬세하고 화려한 1, 2층에 비해 3층은 상대적으로 투박하지만 진중한 멋이 있는 공간이었다. 괴테는 초록색 민무늬 벽지에 넓은 창과 하얀 커튼이 소탈하면서 세련된 인상을 주는 ‘시인의 방’에서 작품을 집필했다고 한다. 특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파우스트》 1편이 이곳에서 집필됐다고 하니 대문호의 문학활동에 큰 부분을 차지했던 공간이다. 그 옆방은 ‘인형극 놀이의 방’으로 어린 괴테가 인형극의 대본을 직접 짜면서 일종의 습작, 집필연습을 했다고 하니, 인형극은 괴테에게 단순한 놀이 이상의 문학적 성장 동력이었을 것이다. 3층은 그의 문학적 성장을 가장 많이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지하부터 3층까지 총 4층으로 이루어진 괴테 하우스에서 시간을 보내다 문득 시계를 보니 거의 다섯 시간이 흘러 있었다. 괴테에 대한 관심과 존경으로, 집안 곳곳의 많은 볼거리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미 파리에서 경험이 있지만, 존경하고 사랑하는 작가의 자취가 있는 곳을 가본다는 건, 단순한 관람을 넘어 시공간을 뛰어넘는 만남을 의미한다. 내게 책은 가장 의미 있는 사물이자, 두 발로 걷지 않아도 떠날 수 있는 여행으로의 매개체였다. 그런 내게 어린 시절의 문학영웅이었던 괴테를 만나며 여행을 마무리했던 건 여행의 여운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그와의 다섯 시간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낸 시간 중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