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취향>> 중에서
노트르담 성당을 등지고 왼편으로 다리를 건너면, 고서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아담하고 낡은 조금은 지저분한 초록색 외관과 노란 간판이 인상적인 서점은 1921년에 문을 연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 Company)이다. 영화 〈비포 선셋(Before Sunset)〉에서 주인공 제시가 작가가 되어 출간기념회를 가졌던 곳이자, 옛 연인 셀린느와 재회한 곳이다. 여행 중 우연히 기차에서 만난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6개월 뒤 다시 만나기로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다. 제시는 그들의 아쉬운 만남을 글로 옮기고, 소설 출간기념행사 차 셀린느가 사는 파리에 온다. 9년 뒤 이 서점에서 어렵게 재회하는 두 사람. 여행이 만든 인연과 흐르는 시간에 달라지는 주인공의 사고와 사유, 그럼에도 여전한 감정 등을 아름답고 진지하게 표현한 영화다. 이 영화를 인상 깊게 보고, 두 주인공의 만남을 회상하며 고서점을 찾았다.
파리에 자리한 서점이기에 이곳에서 프랑스 서적을 기대하기 쉽지만, 이 서점에 있는 책은 대부분 영문서적이다. 이곳이 프랑스에 미국 문학을 전파하기 위해 세워진 미국문학 전문서점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조이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에즈라 파운드,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 등 20세기 당대의 문호, 문학가들에게 사랑받았던 유서 깊은 ‘문학 거처’라고 할 수 있다. 이 서점을 소재로 한 책이나 영화가 있을 정도인데, 서점 최초 설립자인 실비아 비치는 《셰익스피어&컴퍼니 세기의 작가들이 사랑한 파리 서점 이야기(Shakespeare and company)》라는 회고록을, 제레미 머서는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Time Was Soft There)》이라는 소설을 썼다.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은 저자인 제레미 머서가 실업자가 되어 센 강 변을 거닐다 이 서점을 알게 되고, 서점에 머무르게 되는 이야기다. 서점에서 겪었던 일, 느꼈던 느낌을 써나간 경험적인 소설이다. 성인 작가가 작은 서점을 배경으로 쓴 작품이지만 이 작은 공간에서의 일상은 상당히 모험적이고, 모든 걸 잃은 것처럼 보이는 저자가 다른 가능성과 꿈을 꿈꾸며 만들어가는 과정이 진지하면서도 천진하게 그려져 ‘어른아이’의 이야기라는 느낌을 준다. 이 서점은 영화에도 많이 등장했는데, 영화 〈비포 선셋〉에서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 작품 속의 낭만적인 배경이자, 등장인물의 인연을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로 등장한다. 뒤틀린 인연과 갈등을 해결하거나, 새로운 만남을 마주하게 만드는 작품의 열쇠 같은 기능을 했다.
나는 어떤 인연을 대하게 될지 작은 기대를 안고 서점으로 들어갔다. 하긴 서점과의 만남 자체가 이미 인연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이가 들고나며, 서점과의 새로운 인연을 바라는 것 같은데, 만인에게 열린 듯 보이는 서점은 은근히 폐쇄적이다. 서점 입구가 한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좁은 입구 안으로 들어서면,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쉽지 않은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셰익스피어 & 컴퍼니》를 보면, 서점의 전 경영자인 조지 휘트먼이 서점에 머물 수 있는 가능성을 모두에게 열어두고 있지만, 그 가능성을 매우 까다롭게 타진하던 게 떠올랐다. 좁고 복잡한 공간에서 쉽게 들고나는 인연에 쉬이 마음 주지 않는 옛 경영자의 마인드가 읽히는 것 같았다. 인연이란 쉬운 게 아니니까.
좁은 입구를 통과하면, 책이 빼곡히 꽂혀 있고 쌓인 모습이 드러난다. 아담한 규모의 공간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것 같았다. 이곳을 방문한 이 누구라도 작고 예쁜 서점이 마음에 들어 사진으로 담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공식적으로 촬영은 불가하다. 그러나 곳곳에 지키고 앉아 있는 직원들이 있지만, 책을 읽으며 매우 대충대충 망을 보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은 살짝살짝 사진을 담곤 한다. 사진을 대 놓고 많이 찍어대지만 않는다면, 별다른 제지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작은 서가나 독서실 같은 조용하고 평온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 같았다. 망보는 직원들과 감시 카메라에도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머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책과 역사가 있는 곳이라 그럴 것이다. 책이 있는 곳이 어떻게 불편할 수 있을까. 책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재주가 있는 사물이니. 첫 만남에 유독 편안했던 서점에서 어린 시절 위안을 주던 책이 떠올랐다. 어릴 적 무얼 안다고, 제 감정 하나 제대로 돌보기에도 너무 어렸던 10살 무렵, 곁에 두고 보던 책이 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어린 천사》라는 책은 어린 남매 험프리와 마일즈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책의 마지막이 안타깝게도 오빠인 험프리의 죽음이었다. 그 책을 수십 번은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도 험프리가 죽는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눈물이 났다. 평범했지만 단란한 일상을 보내던 어린아이에게 뭐 그리 크나큰 설움이나 슬픔이 있었겠냐마는, 어린 마음은 작은 감정도 감당하기 어려운 법이다.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작은 아픔, 슬픔에 그 책을 집어 들곤 했다. 그 장면을 보며 나의 감정을 덮고, 스스로 공감받고, 위로했던 기억이 있다. 처음 가본 낯선 서점에서 어린 시절 각별했던 책이 떠올랐던 건, 아마 그 즈음 나의 여행이 조금 힘들었고, 그만큼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가 편안한 공간이었던 까닭이다. 그러고 보면 유년의 기억과 책은 그 서점에서 마주한 나의 인연이었다.
오래된 책 냄새가 기분을 좋게 하고, 오래전 머물던 작가들의 체취가 여전히 느껴지는 곳에서 편안함을 느끼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치 이 서점의 지난 역사를 오래도록 공유해 온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 들었다. 그 서점은 처음이었지만, 그곳에 관한 꽤 다양한 이야기를 오랜 시간 천천히 접해왔다. 영화와 책 속 주인공들이 서점에서 겪고 만들어간 이야기들처럼 나도 이곳의 일부라도 내 것으로, 나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서점 주인과 이야기도 나눠보고 싶었고, 다른 작가들처럼 그곳에 머물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볼 수도 있었을 텐데, 서점과 나의 인연을 만들어가 볼 수 있을 텐데, 시간이 넉넉지 않은 여행자는 아쉬울 뿐이었다.
책 두 권을 골랐다. 처음 보는 시집과 익숙한 스토리의 〈어린 왕자〉. 채 성장하지 못한 ‘어른이’처럼 작고 아담한 공간을 자유로이 모험하고 향유했을 많은 보헤미안 작가와 그들이 만들었을 무수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파리의 고서점 그리고 어른이 된 아이가 읽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가진 ‘동화’는 ‘사유의 자유’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묘하게 유사한 감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자유로운 보헤미안의 여유가 느껴지는 공간에서, 나 역시 그 여유를 부분적으로나마 향유하고자 했다. 다시 서점을 찾을 때는 보다 모험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을 하길 기대하며, 그 모험의 끝에는 반드시 자유로움과 여유가 함께하길 바라며,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구입한 두 권의 ‘자유’ 또는 ‘여유’를 읽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