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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i 고나희 Oct 18. 2017

와이탄, 건축물이 인물보다 돋보이는 곳

<<여행의 취향>> 중에서


와이탄(外灘)의 밤은 건축물을 위해 존재한다. 상하이 와이탄의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것은 건물이지, 그 사이를 오가는 인물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건축물이 주인공이다. 와이탄 앞으로 길게 이어진 전망대는 상해 야경을 즐기려는 이들로 늘 붐빈다. 전망대 앞으로는 황푸강(黃浦江)이 자리하고, 강 너머에는 상하이의 상업과 금융 중심지인 푸둥(浦東) 지구가 있다. 푸둥 지구에는 상하이의 상징, 동방명주가 크고 작은 진주가 옥쟁반에 떨어지는 것 같은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황푸강의 야경이 유명한 것은 동방명주와 같은 높은 건축물들이 검푸른 강의 수면 위로 저마다 다채로운 빛을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와이탄의 야경이 푸둥의 그것보다 덜 하냐면 그건 아니다. 와이탄에서 강 건너 멀리 빛나는 푸둥 지구의 화려한 야경에 홀려있다 보면, 정작 가까이에 있는 와이탄의 빛나는 밤을 놓치기 쉽다.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강 건너에 눈길을 주었다가, 고개를 돌려 와이탄으로 시선을 돌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해도 두 지구의 밤을 모두 담고 즐기기엔 부족하지만 말이다.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하는 푸둥과 와이탄은 서로 다른 도시 풍광과 매력으로 다른 성격의 감흥을 이끈다. 상업과 금융 지구로 설계된 푸둥의 야경이 화려하고 세련되었다면, 근대 유럽의 자취가 남은 와이탄의 밤은 강렬하고 우아하다.

와이탄에 있는 대부분의 은행 건물들은 근대 서구 양식을 따르고 있다. 와이탄에서 유럽 어디쯤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은행 건물들이 더욱 멋스럽게 보이는 건 강렬한 조명 덕이 크다. 새카만 밤하늘 아래 노란 조명을 받은 유럽식 건축물들이 이색적이다. 마치 건축물이 살아있는 듯 생동감 있다.

와이탄을 배경으로 인물사진을 찍을 때는 마음을 비우는 게 좋다. 와이탄의 조명은 건축물을 비춘다. 그곳에서 인물사진을 화사하고 멋지게 담으려 한들, 건물 아래에서 위를 향한 조명이 비추는 것은 사람 아닌 건축물이다. 빛을 발하는 건축물에 비해, 빛의 바깥쪽 어둠에 자리한 인물은 빛을 잃는다. 각도를 이리저리 돌려 플래시를 터뜨려도 잘 나오는 건 인물 아닌 건물이다.

그러니 와이탄에서는 주인공 되기를 일찍이 포기하는 게 좋다. 나 역시 나를 외면하는 와이탄의 조명을 몰라보고 내 사진 찍기에 열중했다가 곧 부질없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어리석은 여행자 중 하나였다. 강렬하고 화려한 모습을 뽐내는 건축물들 사이에서, 나를 카메라에 담기보다는 멋진 도시 풍광과 건축물을 감상하는 게 현명하다. 그곳의 주인공은 건축물이다.

내가 하는 여행이고 내가 사는 삶이니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자 무던히 노력해왔다. 그렇게 하는 게 잘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여행과 삶의 주체는 내가 되어야 했다. 내가 가장 빛나야 했고 가장 많은 걸 잘 누려야 했다. 그러나 와이탄의 야경을 대하며, 나를 비추는 대신 건축물로 향하는 빛을 경험하며, 내게 당연하고 분명해 보이던 사실이 나의 생각뿐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삶의 주체가 나인 것이야 분명하지만 나의 삶은 나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었다. 내 삶에는 다양한 인물, 사물, 시간, 장소, 가능성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무수한 것이 나와 함께 나의 삶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모두 통제하고 관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도 안 될 일이었다. 나의 삶이니 나의 여행이니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할 일이 아니었다. 가장 빛나길 바랄 일이 아니었다. 나의 소중한 삶을 나와 함께 이뤄주는 다른 ‘누군가’와 다른 ‘무엇’에게 그들의 몫을 인정해주고 나눠줄 줄 알아야 했다.


와이탄의 야경 이전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의 삶 안에서라면 매 순간 내가 가장 빛나길 바랐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불빛 하나에 인지한 내가 우스웠지만, 나는 그런 당연한 이치를 그제야 깨달을 만큼 범인(凡人)이었다고 그럴 듯한 핑계로 나를 위로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조명과 이미지를 보여주던 푸둥, 생동하는 건축물과 인물을 외면하는 빛이 자리했던 와이탄, 화사한 불빛으로 물들어 일렁이던 황푸강, 강을 가르던 유쾌한 페리가 상하이의 밤을 즐거이 채웠다. 그 밤의 다채로운 즐거움을 느끼며 나의 삶을 이루는 수많은 무언가와 누군가를 느꼈다. 이제껏 그들 제각각 주인공일 수 있었음에도, 들러리가 되어준 데 감사하며, 나의 삶 안에서 매 순간 가장 빛나고 돋보이고자 했던 욕심을 슬며시 놓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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