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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i 고나희 Oct 31. 2017

그와의 만남

<<여행의 취향>> 중에서


그를 만난 오후는 우연이었다. 메종 드 발자크(Maison de Balzac)는 한국에서부터 파리에 가면 꼭 들러보려고 마음먹고 있던 곳이다. 파리 도착 첫날부터 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워낙 깊고 크게 마음속에 자리한 그이기에, 그를 만나기 전 준비를 하고 갈 생각이었지 우연히 허술한 상태로 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과 재회를 통해 나는 ‘인연이란 우연을 가장해 찾아오고 이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엄마와 가볍게 다툰 뒤였다. 유독 친한 모녀 사이인데도 긴 여행은 다툼을 불렀다. 너무 화창해서 그냥 흘려버리기 아까운 날, 파리의 가을치고는 쉽지 않은 귀한 날, 지금은 기억나지도 않을 소소한 일로 엄마와 다퉜다. 피곤하다며 먼저 숙소로 가시는 엄마를 모른 체하며, 혼자 파시(Passy)로 걸음을 옮긴 참이었다. 파시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짜증과 신경질이 날 대로 나서 여행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싶었다. 단지 그 좋은 날씨와 바람이 아까워 기를 쓰고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번에는 나도 지지 않을 셈이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귀 기울이며, 한적한 도심 주택가를 걸었다. 고급 주택가인 파시는 인도와 도로가 잘 정돈되어 있어 거닐기 좋고, 우아하고 밝은 분위기의 건물이 많이 자리한 곳이었다. 파시 특유의 편안하고 밝은 분위기 덕분이었는지, 그때 즈음엔 파리에 많이 익숙해져서인지 지도 없이 처음 와 보는 곳을 홀로 거니는데도 마음이 편안했다. 덕분에 화도 가라앉고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숙소에 잘 도착하셨을지 뭘 좀 드셨을지 나처럼 기분이 나아졌을지 궁금하고 걱정됐다.


그런 마음에 숙소로 서둘러 돌아가려던 나를 붙잡은 게 그였다. 짙은 녹색 문 앞에 우뚝 서버린 건, 발자크의 공간을 만나서였다. 메종 드 발자크,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대문호 오노레 드 발자크(Honoré de Balzac)를 기리며 그의 유품을 보관, 전시하고 있는 일종의 기념관이나 문학관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지만, 나 같은 길치가 무려 혼자서 찾으려고 했다면 쉽게 찾을 수 없었을 거다. 몇 번이나 헤매고 헤매다 간신히 찾았을 테지. 이렇게 쉽게 길을 가다 우연히 발견하고 보니,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만 같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알아온 발자크였다. 그에게 깊은 마음을 두게 된 건 꽤 성장하고 난 후였지만. 어린 소녀였던 나는 밤을 새워가며 그의 작품을 읽었다. 재미와 흥미, 감동이 가득했던 그의 작품이 가진 의미를 알게 된 건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대학 때 전공이 서양사라 전공 강의는 서양의 역사가 주였고, 역사를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리, 종교, 예술 등을 포함한 문화에 대한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연구와 공부가 필요했다. 그런 강의와 학습의 영향으로 내가 새롭게 알게 되고 접하게 된 것 중에 발자크가 있었다. 프랑스사에 관심이 있던 내게 프랑스 호적부와 경쟁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다양한 계층의 인물군과 사회문화적인 제도와 관습 등에 대한 총체적인 연구를 통해 하나의 소설, 문학을 넘어 역사서로까지 기능했던 발자크의 저서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사실적이면서도 파편적이지 않고, 총체적으로 현실을 안고 담은 발자크의 작품이 가진 흥미의 이유와 원인을 알게 되고부터는 더욱 흥미롭게 느껴진 것이다. 내가 가장 큰 흥미를 느끼며 관심 갖는 서적의 장르가 소설과 역사서였으니 발자크가 내게 준 감흥은 정말이지 큰 것이었다.


많은 작품이 인상적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발자크의 작품은 〈골짜기의 백합(Le Lys dans la Vallée)〉이다. 이 소설은 산문이지만, 감정을 절제하며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어 시적인 느낌을 준다. 또한, 당대의 프랑스 사회의 문화와 관습을 보여주어 소설적인 재미에 사회, 역사적인 사실까지 더하고 있다. 이 작품을 보며 발자크가 선이 굵은 역사 소설만을 쓸 줄 아는 작가가 아닌, 섬세한 감정선을 그릴 줄 아는 인물임을 알게 됐다.


5시가 가까운 시각, 메종 드 발자크의 직원은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폐관 시간이 다 되어 입장료를 받지 않는 것 같았는데, 파리의 다른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운이 좋다 생각하며, 어서 들어가라 하는 그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조심스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저 집이었다. 거창하게 문학관이나 기념관이라고 간판을 달지도 않았고, 이곳저곳 작가의 흔적을 과장하고 강조하며 늘어놓지도 않은, 작가가 살던 공간에 쓰던 물건을 그대로 둔, 참으로 수더분하고 편안하게 정돈된 곳이었다. 발자크가 쓰던 필기구와 그가 보낸 시간과 노고의 흔적이 느껴지는 오래된 책상, 그에게 의미 있는 주변 인물들의 초상까지. 곳곳에 작가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묻어 있었다.


파리에 꽤 머물렀던 첫 번째 파리여행에서 메종 드 발자크를 두 번인가 세 번 방문했다. 파리를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찾은 그곳에는 그의 흔적만이 아닌, 이제 그와 내가 소통한 시간의 결도 쌓여 있었다. 나는 메종 드 발자크, 이 빈티지한 품위와 부담 없는 고요가 머물던 공간을 철문과 창틀, 현관과 내부 탁자 등에서 볼 수 있었던 짙은 녹색으로 기억한다. 소탈하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자아내는 짙은 녹색이 귀족이었으면서도 민중의 삶에 깊이 관심을 두고 분석해 글로 남겼던 그와 그가 머물던 공간에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파리여행에서 그를 만난 건 로댕미술관에서였다. 로댕과 발자크는 마치 나와 발자크가 그의 공간에서 소통했듯이, 발자크 사후에 인연을 맺었다. 로댕이 발자크의 동상제작을 의뢰받아 만들면서 시작된 것인데, 로댕은 생전 만난 본 적 없는 발자크 삶의 흔적을 찾아 발자크의 집을 몇십 번이나 찾았다고 한다. 이런 인연을 갖는 그들인데 왜 난 로댕미술관을 찾으며 발자크를 만날 기대를 못 했는지. 그와의 두 번째 만남 역시 내게 느닷없이 다가왔다.

정원 한켠에서 그의 동상을 발견했다. 로댕미술관 정원에 있던 발자크에게서는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기리는 동상이 갖기 마련인 정확한 묘사와 뚜렷한 선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마치 흘러내리는 듯 불분명하고 언뜻 기괴하게까지 느껴지는 형상이었다. 발자크와 로댕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발자크 동상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과연 로댕답다는 생각을 하며 정원의 남은 공간을 둘러보고 1층을 지난 2층 어느 방으로 들어섰을 때 정원을 바라보는 그의 두상을 대할 수 있었다. 거칠게 파인 그의 두 눈은 정확히 그 앞의 창문 밖을 향하고 있었다. 대문호에 대한 예우였을까, 아마도 미술관에서 가장 좋은 전망이 그의 시선에 걸렸다.

로댕을 만나러 간 곳에서 발자크를 만난 그 날은 두 번째 파리여행 최고의 날이었다. 그토록 좋아하고 존경하는 이를 둘이나 만난 로댕미술관에서 몇 시간을 보낸 것인지, 하루의 3분의 2를 그 공간에서 비워냈다. 숙소에서 만나 미술관에 같이 왔던 친구들은 일찌감치 보낸 뒤였다. 로댕에게 미안하지만 이제 로댕미술관 역시 발자크로 기억된다. 그곳에서 로댕의 수많은 뛰어난 작품을 접하고 감탄하고 놀라워했지만, 정원과 창문 앞에서 만났던 발자크의 두 모습은 다른 작품들을 훨씬 뒤로 밀어냈다.


우연한 만남과 재회, 파리는 내게 발자크와의 만남을 통해 선물 같은 순간을 마련해 줬다. 이 우연한 인연이 즐겁고 만족스러웠던 건 발자크와 로댕이 내게 익숙한 일상의 인물이어서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을 직접 만나 본 적 없다. 이미 세상을 떠난 그들이기에 앞으로도 직접 대할 기회는 없겠지만 작품을 통해 오랜 시간 그들을 만나왔다. 그들은 내게 얼마나 다채롭고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는지. 특히, 책과 함께 한 내 삶에서 발자크의 소설 작품은 일상의 한 자리를 꾸준히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일상의 인물을 굳이 집을 멀리 떠나온 파리에서 만난다는 건 새로운 일이자 익숙한 일이었다. 일상과 여행이 접합하는 그 지점에 그가 있었다. 나의 집에도, 집을 떠나온 파리에도 그가 있었다. 익숙한 인물이 주는 두근거림이 나를 가득 채웠다. 앞으로 내가 대할 그의 모습은 어떤 것일지. 또 다른 설렘으로 다음 재회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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