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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i 고나희 Nov 09. 2017

세상의 기원과 마리안느

<<여행의 취향>> 중에서

쿠르베와 마리안느를 보기 위해 그곳에 갔나 보다. 센 강 좌안에 자리한 오르세 미술관에 간 것은 해가 뉘엿뉘엿 질 때였다. 로댕미술관에서 하루를 거의 통째로 보내고 온 뒤였다. 나는 일정에 고르게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선호도에 따라 머물 시간을 정하는 여행자니까.


오르세 미술관을 처음 경험한 건 센 강 유람선 위에서였다. 과거 기차역이었던 독특한 외관이 주는 감흥은 특별했다. 특히 나처럼 기차와 기차역, 기찻길에 깊은 애정을 가진 사람에게 라면 그곳을 특별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 후에 경험한 내부는 길쭉한 구조에 천장의 대부분을 차지한 넓은 유리창을 통해 기차역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19세기 작품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고, 회화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조각과 장식미술, 가구, 사진 작품도 많이 전시되어 있다. 오르세에서는 한 시간 반 정도, 길게 잡아야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이 주어졌다. 아까운 이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 선택해야 했다. 과감하게 선별적 관람을 하기로 했다.

오르세에서 내가 가장 눈여겨본 두 가지는 구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의 작품 〈세상의 기원(L’Origine du Monde)〉과 프랑스 공화정을 상징하는 ‘마리안느(Marianne)’였다. ‘프랑스 문화와 예술’은 대학의 오래된 인기 교양 강의였다. 교수님께서 “이 작품은 워낙 파격적인 작품이니 1초만 보여주겠어요. 하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니 더 보고 싶은 학생은 각자 찾아보도록 해요.” 하며 보여주셨던 작품이 〈세상의 기원〉이었다. 여체의 음부를 확대한 양 그 부분만 적나라하고 세밀하게 그려 강조하는 이 작품은 파격을 넘어 충격이었다! 학생들 모두 말을 잃었었다.


그 작품을 실물로 접했다. 쿠르베는 이상적이고 공상적인 회화에 반격을 들어, 현실을 솔직하게 관찰하고 표현했던 프랑스 화가다. 현재는 사실주의(리얼리즘)의 선구적인 작가로 인정받고 있지만, 당대에 그의 작품은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파격적이라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니 〈세상의 기원〉이 몰고 온 파장은 말도 못 했다.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된 이 작품은 심사가 거부되었다. 후에 이 작품은 작품에 너무나 어울리는 인물에게 가게 되는데, 바로 정신분석학자 라캉이다. 이 작품은 라캉 사후에 오르세 미술관에 머물게 된다.

오르세 미술관에서의 또 다른 수확은 마리안느를 몇 점이나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리안느는 프랑스 공화정과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 정신을 복합적으로 표상하는 여성상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전공 강의인 프랑스사 수업 때였다. 마리안느라는 여성상이 이미지화된 것은 1830년 들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시작이었다.


긴 총과 삼색기를 들고 혁명을 이끈 전쟁의 여신은 마리안느의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1848년엔 프랑스의 상징적인 여성상으로 공포되며 마리안느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마리안느는 프랑스에서 가장 흔하고 대중적인 여성 이름이다. 프랑스 인들은 그들이 쟁취하고 일궈낸 공화정에 가장 친숙한 여성의 이름을 부여했다. 프랑스 공화정에 대한 프랑스 인들의 감정은 이처럼 친숙함과 사랑의 모양을 갖고 있다. 이후 마리안느는 전국 3만 6,000여 개 도시의 시청 입구마다 자리하게 된다.


알고 보면 마리안느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잘 알려진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은 1886년 프랑스가 미국에 기증한 것으로 마리안느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파리에는 미국 자유의 여신상보다 작은 원조(?) 자유의 여신상이 있다. 최초의 마리안느가 18세기 혁명 보닛을 쓴 서민 여성으로 시작되고, 이후 마리안느는 시대와 취향, 유행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때로 마리안느는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나 카트린 드뇌브 같은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고 인기 있는 인물이 되기도 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내가 집중했던 작품들은 매우 ‘표상’적이었다. 〈세상의 기원〉은 여체의 부분화를 통해 인간 삶의 기원을 표상했고, 마리안느는 가장 프랑스적인 이름과 모습의 여성으로 프랑스 공화정을 표상했다. 책과 강의를 통해 많이 접해왔던 두 표상과 이를 반영한 작품들을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눈으로 대하니 묘한 감정이 일었다. 알아왔던 것을 확인하는 데서 느끼는 즐거운 익숙함과 성취감. 오르세에서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쉽지 않았던 건 로댕의 작품들과 쿠르베, 마리안느와의 만남으로 단 몇 시간이 충분히 알찼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오르세는 내게 몇 가지 지점으로 다가왔다. 그 지점들은 매우 역사적이고 미적인 표상들이었다. 내 관심사나 이전에 내가 배워온 것들을 반영하는 지점들이기도 했다. 현재 내가 알고 있고, 느끼는 것을 통해 예술 작품을 감상했던 거다.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어 그 작품의 예술적 아름다움이나 역사적 가치만큼, 감상자의 과거와 현재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작품을 감상하는 이의 눈에는 그의 과거와 현재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감상(여행지에서 대하는 몇 세기 전의 예술작품)은 매우 특수하면서도, 일상적인 것일 수 있다. 나의 일상을 통해 어떤 특수함을 내 안에 연결하고 채우는 것, 오르세에서 내가 느낀 일상과 여행의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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