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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i 고나희 Dec 08. 2017

여백과 정적

<<여행의 취향>> 중에서

공간과 소리를 채우지 않고 비워둘 때 여백과 정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교토 료안지(龍安寺, 용안사)에서 보고 느낀 바도 그와 같은 것이었다. 빈 공간과 고요를 통해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이상을 만난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 료안지는 선종 사찰로,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가레산스이 정원이란 15세기에 선종 전파를 위해 만든 것으로, 일반적인 정원에서 볼 수 있는 나무나 물 등이 없고, 모래와 흰 자갈, 돌, 이끼 등으로만 이루어진 정원이다.


사찰로 가는 길 왼편으로는 넓은 호수가 있다. 작은 다리 외에 여타의 장식물이 없는 단순한 호수에는 조용히 반영만이 비치고 있을 뿐이다. 작은 돌을 깔아 만든 길과 얇은 나무로 엮어 만든 울타리도 자연스럽다. 비어있고 꾸밈없지만 초라하지 않은 정적인 아름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찰 안으로 들어가 조심조심 긴 나무마루를 지나자 돌과 모래만으로 이루어진 정원이 고요히 모습을 드러냈다. 정원 안에는 들어갈 수 없어, 마루에 앉아 다른 여행객들과 함께 정원을 감상했다.

정원 가득 새하얗게 깔린 자갈 위에는 검은 돌 15개뿐. 여백과 고요함을 지닌 정원을 보니, 인적도 소리도 없는 아침 바다 앞에 선 것 같은 느낌이 밀려왔다. 정원을 둘러싼 낮은 담 너머 서 있는 나무까지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다. 15개의 돌은 모양과 크기는 물론, 배치까지 모두 우주를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정원 어느 곳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15개 돌을 한눈에 담을 수는 없다. 이는 우주 전체를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참선을 통해서만 우주의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는 선종의 가르침을 뜻한다.


정원의 넉넉한 여백은 어느새 심신의 긴장을 풀어주고 머리와 마음을 비워주었다. 꽉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 주는 편안함이 스며왔다. 우주의 진리까지 통달하지는 못했지만 비워진 머리와 마음에는 세상만사를 대하는 넉넉함과 관대함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이곳을 몇 번 더 방문한다면 아주 다른 사람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료안지가 아니더라도 공간과 소리가 비워진 곳을 찾는다면 나 자신도 그만큼 비워지고, 비워진 곳에는 편안함이 깃들 것이다.


교토로 오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여유 없이 바빴었는데, 그 생활과 마음상태가 이상스레 느껴졌다. 뭐가 그리 급하다고 그렇게 살았을까, 진부한 후회를 했다. 마음과 머리에 여유가 없으니 나를 볼 때나 다른 이를 대할 때나 날이 서 있었다. 사람과 삶을 대하는 데 기다려줌이 없었고 관대하지 못했다.


나지막한 바람만 오가는 사찰 안, 간간히 바람이 스치는 풍경소리만 들릴 뿐이다. 가득 차있던 마음과 머리를 비웠다. 다시 채워질 게 분명하지만 비워진 기억만으로도 가끔 여유와 평온을 얻기에 충분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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