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취향>> 중에서
노을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그저 노을일 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후 5시, 노을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늦은 오후의 햇살만이 가득한 단수이(淡水)에서 특별한 기대를 하기란 힘들었다. 그저 인상 깊었던 대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不能說的秘密, Secret, 2007)〉의 배경이 그곳이어서 간 거였다. 영화의 인기와 영향이 중화권을 넘어 우리나라와 동남아 등에 상당해, 단수이는 대만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영화의 낭만을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저녁 무렵 도착한 단수이 역은 분주했다. 단수이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는 앞으로 바다가 자리해 마치 넓은 공원 같은 느낌을 주었다. 역 근처부터 바닷가까지 사람들로 꽤 붐볐다. 아기를 누인 유모차를 끌고 산책을 즐기는 가족, 비눗방울 놀이를 하는 아이들,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그려내는 거리의 화가 등 이곳을 즐기는 모습은 다채로웠다. 넓은 공터와 공간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언뜻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 연상되기도 했다.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단수이 노을이 최고라기에 바다로 걸음을 옮겼다. 바다 표면은 노을로 물들기 직전의 햇살로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서서히 노을이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단수이가 물들기 시작했다. 노을이면 노을이지, 하늘의 변화가 아름답지만, 굳이 그걸 찾을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던 나는 얼마나 오만한 여행자였는지.
단수이의 ‘물듦’은 달랐다. 서서히 젖어드는 게 아닌, 하늘과 바다에서 넓고 짙게 물드는 강하고 갑작스러운 물들임을 대할 수 있었다. 누군가 강하게 내 안으로 뛰어드는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변화였고 경험이었다. 바다와 하늘을 넋 놓고 바라봤다. 예상치 못했던 범위와 수준의 붉은 빛을 입은 단수이에 나의 감성도 같은 빛깔로 물들 수밖에 없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하늘의 빛과 색도 변해갔다.
이전보다 어두운 빛이 한껏 짙어진, 검붉은 노을이 바다 위로 낮게 깔렸다. 예상 밖의 일몰이 마음을 강하게 흔들어 놓아 그 모습을 두고 발을 떼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의 감흥을 되새기기 위해 다음 여정으로 어렵게 걸음을 옮겼다. 영화의 배경인 단짱 중학교로 가는 길에 라오지에(老街)라는 시장 겸 먹자골목이 있다. 정적인 낭만 가득한 바닷가와는 다르게, 정겨운 활기와 기분 좋은 소란스러움이 가득했다. 골목에 들어서자 양쪽에 들어선 노점상에서 손님을 끌려는 상인들 목소리가 앞 다투어 들려오고, 무엇부터 봐야 할지 맛봐야 할지 눈과 입이 바빴다.
꼬치 먹거리, 대왕오징어, 한 입 펑리수, 밀크티 등의 주전부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자질구레한 기념품을 파는 상점도 당연히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밝아지는 조명과 많아지는 사람들이 시장 안을 채웠고, 노을의 강한 울림은 점점 커지는 소란함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하지만 처음 대면한 대만, 타이베이(Taipei)의 인상은 붉게 물들며 일렁이는 노을로 오래도록 남았다.
단수이의 노을을 생각하면 또 다른 여행지의 붉은 빛이 떠오른다. 베네치아 부라노 섬에서 본섬으로 돌아오던 수상 택시 안에서 경험했던 노을이 잊히지 않는다. 곳곳으로 뻗은 물길과 골목 그리고 섬을 여행하는 것이 베네치아를 가장 베네치아답게 즐기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날도 베네치아의 섬 몇 곳을 여행한 터였다. 섬과 섬을 수상택시가 손쉽게 이어주지만,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이동하는 데 시간과 체력이 소모되기 마련이다.
유리 공예로 유명한 무라노(Murano) 섬과 색색의 건물이 주는 즐거움이 큰 부라노 섬을 연이어 둘러보자 기분 좋은 노곤함이 밀려왔다.
‘언제 본섬으로 돌아가 저녁식사를 하지?’ 피곤함에 갈 길이 까마득하게 느껴져 수상택시 객실 기둥에 몸을 기대 쉬고 있었다. 아마 베네치아에서 만난 친구였을 거다. 나를 툭툭 치는 손길에 설핏 들었던 잠에서 깨었다. 그 손이 가리키는 곳에 해가 있었다. 빨간 알사탕처럼 동그랗고 빨간 해가 지고 있었다. 그렇게 급하게 지는 해를 본 것도 처음이었던 것 같다. 해 지는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동그랗게 선명한 해가 신기해 그 모습을 연이어 카메라에 담는 사이, 해는 수면 위까지 가파르게 떨어졌다. 해를 담느라 미처 인식하지 못한 노을도 함께 지평선의 끝자락을 물들이고 있었다. 선명한 해의 움직임과 아름다움에 당혹스러움마저 느꼈던 오후였다.
노을의 경험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건, 노을이 관계와 인연을 연상시키는 까닭이다. 자연환경보다 도시환경에 관심이 많은 내게, 자연의 변화란 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자연환경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으니, 자연이란 어느 순간 불현듯 인지하고 느껴지는 상대였던 거다. 노을, 빛, 눈, 바람이 그랬다. 그러니 하늘의 변화, 노을의 움직임도 불현듯 시작되는 것이었다.
관계와 인연도 그러했다. 언제부터 시작되고 끝나는 게 아닌, 시작과 끝이 분명히 보이고 인지되는 게 아닌, 모르는 사이 서로에게 물들고 시작되는 그러다 자취를 감추거나 이어지기도 하는 것이니 말이다. 많은 이들이 좋은 인연을 기대하고 갈망하지만, 인연이란 게 기대한다고 해서 그에 맞춰 오고가는 게 아니지 않나. 정작 인연은 문득, 불현듯, 무심한 순간, 인상 깊게 때로는 당혹스럽게 찾아든다. 들 자리를 굳이 내주지 않아도, 자리를 찾아 나를 물들이는 게 인연이다. 찰나의 노을과 불현듯 들어서는 인연은 그렇게 닮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