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취향>> 중에서
사과향이 느껴지는 곳이 있다. 그저 비행편이 많아 입출국하기가 좋아 찾은 도시, 별 기대 없이 간 그곳에서 새로운 맛과 향을 만났다. 괴테의 도시란 것을 잊고 있었고, 마지막 여정이라 지치기도 해서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자마자 숙소 침대로 직행했다. 숙소에서 편히 쉬며, 전날 막 한국에서 떠나온 한 친구를 알게 되었다. 독어독문을 전공한 그는 한 달간의 어학연수를 앞두고 설레는 마음과 불안하고 떨리는 마음이 반반인 것 같았다.
오후 4시, 애매한 시간이다. 관광이 목적이었다면 숙소에 짐을 부리자마자 밖으로 나갔겠지만, 한 달의 시간을 앞둔 친구와 다음 날이면 이곳을 떠날 내겐 급할 게 없었다. 친구에게는 시간이 너무 많았고, 내겐 시간도 기대도 많지 않았다. 아무튼, 여행지의 인연이란 쉽게 가까워지는 법이다. 금방 친해진 우린 뭘 하며 이 애매한 시간을 잘 보낼까 하다, 자연스레 마시러 나갔다. 워낙 다양한 맥주가 있는 독일이니 간단하게 맛 좋은 맥주나 한잔하려 한 것인데, “여긴 이게 유명하다는데·····.”하는 친구 말에 내가 맛본 건 맥주 아닌 새로운 음료, 아펠바인(Apfelwein)이었다.
사과와인을 가리키는 아펠바인은 프랑크푸르트의 대표적인 음료로, 그냥 마셔도 좋고 물을 조금 섞어 희석하여 마시기도 한다. 조심스레 맛본 아펠바인은 시큼했는데, 첫 맛보다 그 다음 모금이 더 좋았다. 맛보다는 향이 끌리는 술이었다. 시큼한 맛은 즉시 혀에 닿아 생경한 맛을 전해왔지만, 상큼한 사과향 덕분에 서서히 기분이 좋아졌다.
첫 번째보다 두 번째가 좋은 만남. 내게는 유독 그런 만남이 많았다. 첫인상을 잘 못 보는 탓이었다. 내가 본 누군가의 두 번째 모습은 처음보다 나았다. 그 다음 모습은 더 나았다. 어쩌면 처음보다 두 번째, 세 번째에 보다 친밀함을 느끼고 관대한 건지도 모른다. 아펠바인을 함께했던 친구도 그랬다. 겁이 많고 수더분한 친구의 모습에 나와 많이 다른 사람일 거라고, 좋은 아이 같지만 나와는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재미없는 친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조잘조잘 말을 잘하던 그 아이와의 오후는 유쾌했다.
맛보다는 향으로 기억되는 아펠바인, 프랑크푸르트, 독일, 그 아이. 맛은 향보다 즉각적인 느낌이다. 혀끝에 먹거리나 음료가 닿는 순간 맛을 인지할 수 있으니까. 그 때문에 맛이란 향보다 노력을 덜 기울여도 느낄 수 있는 것 아닌지. 반면, 향이란 조금 더 노력을 기울여야 인지할 수 있는 것 같다. 조향사가 아닌 보통의 사람은 코에 어떤 향이 닿아도 그 향이 무엇에서 연유한 것인지 알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니.
세상에는 즉각적으로 인지하고 느낄 수 없는 것도 있다. 바로 느낌이 오지 않고, 느끼고 알아갈 시간이 필요한 게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빠르게 알고 느낄 수 있는 걸 찾았던 것 같다. 그만큼 어렸고 몰랐고 미숙했던 거겠지.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알아간다. 금세 친해지기 어려운 공간, 사람, 사물도 있을 수 있다는 걸, 그편이 오래 이어질 인연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맛보다 향이 강한 누군가 또는 무언가와의 만남을 반복하며 알게 된다.
누구에든, 무엇에든, 어디에든 이제는 조급함을 덜어내고, 기대를 얹어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조급한 판단과 느낌도 더는 쉽게 내리지 않는다. 어떤 향으로 나를 이끌어줄 인연일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