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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ri 고나희 Jun 15. 2018

여배우와 모히토

<<여행의 취향>> 중에서

배우 성수연을 만난 건 힘든 하루의 끝자락에서였다. 나와 그녀는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바르셀로나 숙소 2층 도미토리에 함께 묵고 있었다. 여행도 일상도 늘 즐겁기만 할 수는 없었다. 지치는 여행, 힘든 일상의 하루였다. 여행 전, 잘 처리될 거라 생각하고 마무리 짓고 온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았고, 실망은 불쾌함과 짜증을 불렀다. 몸과 마음이 지친 채 얕은 잠에 들었던 것 같다.


밤늦은 시각, 갑자기 환히 켜진 불에 간신히 든 잠이 깨버렸다. 불빛의 출처가 그녀의 노트북임을 알고 좀 심하게 항의했던 것 같다. 화가 날 상황이긴 했지만 경솔한 행동이었다. 당연히 날 선반응이 돌아올 거라 기대했는데, 너무도 예의 바르게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그녀 앞에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잠이 깨버려 일단 1층 거실로 내려간 나는, 조금 뒤 2층으로 올라와 그녀에게 무례함을 사과했다. 그녀는 아니라며, 충분히 화날 만했고 자신이 경솔했다며 사과했다. 서로의 실수와 무례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나와 그녀의 새로운 인연이 시작되었다. 배우인 그녀는 공연을 위해 영국에 갔다가 공연이 끝나고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녀는 나보다 하루 먼저 바르셀로나를 떠나는 일정이었다.


우린 같이 여행하지는 않았다. 서로 계획이 달랐다. 온종일 각자의 일정으로 바쁘다가, 밤에 숙소에서 만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잠시 잠깐 숙소에서 볼 때마다 반가운 ‘인연’이었다. 그녀는 언제 자신이 떠나는지를 내게 말했고, 나는 그녀가 떠나는 날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 하루 전 밤에 한잔하러 나가지 않겠냐고 청했다. 그러잖아도 내일이면 떠난다는 아쉬운 맘에 혼자라도 나가려고 했다는 이 겁 없는 여배우는 함께 나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우리는 생기발랄한 바르셀로나의 밤거리로 나갔다.


바르셀로나의 여름밤은 정말 청량했다. 소란스럽거나 흐트러지지 않은 건전한 활기와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나도 그녀도 모히토를 주문했다. 중독성 있는 청량한 맛이 스페인의 밤을 꼭 닮았다. 나와 그녀는 서로의 직업, 삶의 계획, 앞으로의 여행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그때의 이야기가 모두 기억나지는 않지만, 즐거웠던 기억만은 또렷하다. 한없이 자유롭고 활기찬, 발랄하기까지 한 바르셀로나의 밤이었다.


그녀와의 인연은 서울에서도 이어졌다. 나는 수연 씨에게 서울에서 공연할 때면 꼭 좀 알려달라고 했고, 수연 씨는 고맙게도 공연 때마다 초대해줬다. 그녀가 출연한 작품을 꽤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서울연습- 모델.하우스〉와 〈2013 D FESTA: 연극의 연습〉, 〈내가 믿는 이것〉, 〈몇 가지 방식의 대화들〉, 〈희희낭락 연애사〉 등은 모두 그녀가 출연하고, 내가 봐온 작품들이다.


진솔하고 담백한 그녀의 연기에 깊이 공감했다. 연극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이라도, 시놉시스와 주제를 담아내고 풀어가는 그녀의 연기를 보다 보면, 배우가 나타내고 표현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녀를 알게 된 후, 연극을 가장 많이 접했던 것 같다. 책을 읽듯이 연기를, 공연작품을 읽어내는 법을 배우게 된 것 같다. 여행에 이은 새로운 경험, 여행 후의 또 다른 여행경험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세 없이 소탈하게 차곡차곡 필모그라피를 쌓아가는 이 멋진 배우를 알게 되어 기쁘다.

그녀는 모히토를 보면 내가 떠오른다고 한다. 내게도 모히토는, 그 청량함은 그녀를 의미했다. 바르셀로나, 경솔함, 실수, 여름밤, 모히토는 새로운 인연을 위한 것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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