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여름. -5
여름은 언뜻 보았던 광고가 자꾸 생각났다.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도서주택’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히 기억에 남았다. 남은 근무 시간에도, 퇴근하는 지하철에서도 내내 머리에 가득한 네 글자를 집에 도착해서야 더듬었다. 잠들기 전 고요하고 차분한 제 방에 들어서야 찾아보았다. 어디서고 휴대폰으로 검색할 수 있었겠지만, 온전히 혼자가 된 상황에서 찾아보고 검토하고 싶은 여름은 도서주택에 막연하지만 강한 끌림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본 게 집에 관한 무엇이라면 독립과 관련된 중요한 이슈가 될 수도 있을 터였다. 뭔가 제게 중요할 것만 같은 이슈를 아무렇게나 쉽게 처리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여름이 ‘주거’나 ‘집’, ‘아파트’, ‘오피스텔’ 따위를 휴대폰과 노트북으로 많이 검색했기 때문에, 온라인 플랫폼의 로직이나 SNS의 알고리즘이 관련 광고를 수시로 노출하기 시작하던 참이다. 집을 구해야 했다. 독립을 결심하고 집을 구할 생각을 하자, 마음이 급해지는 그였다. 마음이 동했으니, 이제 얼른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으른’이 되는 걸까. 여름은 어깨를 으쓱했다. 실은 설레기도 했다. 독립의 이유가 아빠와의 부정적인 상황에서 시작했더라도, 독립이라는 새로운 미래를 그리며 조금은 설레고 뭔가 즐겁고 이상스러운 기대감이 들었다. 그러던 차에 도서주택에 대한 광고를 본 거였다. 관심사가 있으니, 관련된 것이 저절로 여름에게 도달한 걸까.
여름은 아까 본 마케터의 휴대폰 화면이 인스타그램 앱이었던 것을 기억해서는 앱에서 도서주택을 검색했다. ‘계정’과 ‘추천’ 태그로 ‘도서주택’이 떴고, 계정 탭을 클릭했다.
도서주택 5천 호를 공모합니다.
계정의 상단 게시글을 보았다. 청약 공모였다. 언뜻 일반적인 주택 청약 공모 광고 같았지만, 낯선 단어의 조합에 고개를 갸웃했다. 도. 서. 주. 택.이라는 것은 도서관이라는 건가, 주택이라는 건가. 가만, 도서‘관’이라고는 안 했어. ‘도서’와 ‘주택’이라는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 두 개념 사이에서 여름은 호기심과 의구심을 느꼈다. 그리고 공고를 좀 더 뜯어보기 시작했다.
① 북텍클은 2088년 10월 10일부터 입주자에게 도서주거서비스를 맞춤형으로 제공하는 「특화형 도서주택」 5천 호를 공모합니다.
② 특화형 도서주택은 입주자의 특성(책 취향·독서 방식·선호 등장인물 캐릭터·선호 사건 및 내용 구성 설정·선호 글 전개 방식·선호 시점 등)에 맞춘 도서주택을 최대 10년 동안 무료 임대 형태로 제공하는 서비스입니다.
③ 입주자는 자기 취향과 관심사에 기반 한 책에서 10년 동안 거주할 수 있습니다.
④ 국토교통부에서 입주자의 특성에 맞는 공간 배치와 서비스를 갖춘 ‘특화형 매입 임대주택’ 공모 등을 진행하는데, 도서주택은 이런 방식 공모의 업그레이드 버전입니다(단, 국토교통부 주관 공모와 달리 ‘북텍클 센터’라는 민간 운영 및 주관처 진행 공모입니다).
⑤ 북텍클은 심사를 거쳐 2087년 6월 입주자 선정 명단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⑥ 자세한 내용은 북텍클청약플러스(apply.booktechl.or.kr)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많은 분의 관심과 지원을 바랍니다.
여름의 손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화면을 계속 밀고 있었다. 두 눈은 쉴 새 없이 화면을 따라가고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에 고정된 여름의 두 눈 위로 주름살이 잔뜩 잡혔다. 제법 골똘한 표정까지 지은 여름은 화면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집중했다.
카드 뉴스 형식의 공고문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여름은 호기심에 이끌리는 동시에 뭔지 모를 두려움에 조심스럽게 공고문 하단에 연동된 북텍클청약플러스 링크를 클릭했다. 온통 초록색 창이 나타났다. 단도(1도) 초록색 뻬다로군. 옐로우를 높이고, 사이언(블루)을 많이 뺀 거 같은데, 여름은 생각했다. 어떤 색이든 출판 인쇄 방식으로 환산하는 북디자이너 여름이었다. 그녀는 이런 자신의 버릇을 인지할 때마다 징글징글하면서도 재미있다니깐, 하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이 세상에서 책 만드는 것만큼 재미있는 건 없으니까.
여름이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한 건 이야기의 힘을 강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책에는 다른 길이 있었다. 나와 다른 인물이 나의 삶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다른 길이 열리는 것 같았다. 그는 힘들거나 우울할 때면 책 속으로 도망치곤 했고, 그 안에서 도망쳐 버린 문제를 여는 열쇠를 발견했다. 책을 읽고 나면,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자신을 둘러싼 상황은 변화된 게 없는데, 문제가 해소되고 해결되는 것을 몇 번이고 경험한 이후로 책은 여름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자 ‘곳’이 되었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는 여름이 책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은 건 어쩌면 필연이었다. 독자로서 북디자이너로서 책을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게 여름의 삶이었다.
책은 여름과 아빠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여름은 아빠를 닮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빠와 닮은 점이 있었다. 여름도 아빠도 책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책의 종류는 달랐지만, 책을 좋아하는 취향은 닮았다. 그렇기에 여름이 아빠에게서 상처받을 때마다, 도망치고 싶을 때마다 찾았던 게 책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였다. 책은 여름이 아빠가 있는 현실로부터 도망친 유일한 곳이자, 아빠와 여름의 교집합이었다. 똑똑. 여름아. 엄마의 노크 소리와 다정한 목소리에 여름은 한참이나 집중하던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