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여름. -4
직장인에게 회사 일과 중 가장 기대되는 시간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점심시간일 것이다. 여름도 다르지 않았다. 정신없이 오전 업무를 쳐 내고 11시 45분이 되면, 오늘 뭐 먹지? 회사 구내식당에 어떤 메뉴가 나올까? 오늘은 회사 밖으로 나가서 먹을까? 고민하며 한숨 돌렸다. 팍팍한 회사 생활에 점심은 잠시나마 ‘쉰다고’ 착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평소라면 동료들과 함께 12시 정각에 사무실에서 튀어 나갈 터였다. 그러나 오늘 여름은 회사 동료들에게 속이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식사를 걸렀다. 밥을 먹는 대신 카페로 갔다. 회사 1층 카페도, 회사 근처에 있는 주말이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입장하는 인기 많은 대형 카페도 아닌, 회사에서 13분쯤 걸어가야 갈 수 있는 카페 <볕> 테라스에서 시간을 보낼 거다.
테라스에 이른 오전부터 오후 4시까지 볕이 해사하게 잘 들어 이름도 ‘볕’인 카페는 여름이 몰래 찾는 아지트였다. 출판사들이 밀집된 이 지역에서 회사 사람 아니라도 출판계 사람을 만나는 건 일상이었지만, 그래도 꽤 잘 숨을 수 있는 곳이 <볕>이었다. 회사에서 남몰래 상처받고 그 상처를 혹시나 누군가에게 내보일까 두려울 때나, 괜히 혼자 있고 싶은 날이면 여름은 이곳을 찾았다. 이 지역에 일반화된 대형 카페와는 달리 적당히 아담한 규모와 아기자기한 실내에서 실외 정원으로 이어지는 길이 수수하게 멋스러웠고, 무엇보다 큰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애매한 위치 덕분에 회사 사람들이나 주변 출판사 직원들이 그나마 덜 찾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가고 오는 시간이 약 26분. 넉넉히 30분은 잡아야 하니 <볕> 테라스를 즐길 시간은 20분 남짓이었지만 그럼에도 여름은 자신에게 숨 쉴 틈을, 생각할 여유를 잠시나마 주고 싶었다. 짧지만 질 높은 시간이 필요했다. 요즘 그녀의 머릿속은 ‘독립’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독립에 대해서 이것저것 생각해 보고 고민해 보고 결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아침 일찍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면 힘이 싹 빠져서 자기 바쁘고 자고 나면 다시 하루가 금세 시작되어 버리는 일상이 반복되니 도무지 깊이 생각해 볼 틈이 안 났다. 그나마 오전 업무 뒤에 체력이 아직 남아 있는 점심시간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은 빠른 걸음으로 평균 13분은 걸리는 길을 9분 만에 걸어와선 바로 가장 빨리 제조되는 음료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커피를 기다리고 받는 시간까지 포함해 25분쯤 일상에 틈을 만들어 낸 거다. 식사하지 않아 힘이 조금 없지만, 한 끼 정도야 괜찮다. 있다가 회사에 돌아가 개인 서랍 안의 간식들로 때우면 될 터였다. 작은 편의점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고 귀여운 간식들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호. 잠시 제 간식을 생각하며 웃음 짓던 여름은 태도를 다잡았다. 이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준비할 게 많은데 뭐 하는 거야 진짜. 여름은 자신을 탓하며 독립에 집중하고자 했다. 그런데 뭐부터 준비해야 할까. 막막했다. 지금껏 독립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실은 성인이 된 순간부터 막연하게나마 늘 생각해 오던 것이 독립이었다. 그러나 당장 독립에 대해 마음을 먹자 쉽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일단 지속되던 일상에 변화를 주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습관적으로 주어지던 루틴과 일상이 늘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반복되는 가운데 삶에 리듬과 안정감을 주었던 게 사실이다. 반복되고 고정된 일상이 주는 안정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식으로의 삶을 시작한다는 게 귀찮게도, 어렵게도, 무섭게도 여겨졌다. 잘할 수 있을까, 잘 해낼 수 있을까, 자꾸 주저하고 뒷걸음질 치게 되었다.
그래도 어렵게 만들어 낸 점심시간의 틈을 알차게 보내야 한다. 당면한 독립에 겁은 좀 나지만 일단 독립 관련 이것저것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정보 검색이나 수집 정도야 그리 부담스럽지 않으니까, 이걸 하다 보면 브레인스토밍도 할 수도 있고 독립에 대한 자신감이 좀 붙을지도 모른다. 여름은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스마트폰으로 독립, 주거, 집, 월세, 전세 따위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잘 찾아보지 않던 키워드를 콘텐츠 포털과 영상 포털, SNS에 넣어서 검색했다. 집, 주거, 청년 주택, 청년 대출, 오피스텔, 원룸, 아파트, 익숙하면서도 낯선 용어들. 찾다 보니 정리가 좀 되긴 했다. 주거 형태와 주거 비용을 먼저 생각해야 했고, 그다음으로는 구체적으로 살림 방법이나 살림에 필요한 아이템들이 무엇인지도 알아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세대주가 아버지였다면, 독립해서는 여름 본인이 1인 세대주가 될 터였다. 여럿이서 살 때와 혼자 살 때는 살림 규모도 달랐고, 가족 구성원이 살림을 분담하던 것과는 달리 혼자서 온전히 해야 했다. 자기 혼자 자기를 위해서 청소며 빨래며 식사 준비를 감당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여름에게는 3인이 함께 거주하는 삶의 형태에서 1인 가구가 되는 것은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변화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변화될 삶의 지점을 생각하던 여름은 번뜩 점심시간이 끝나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제까지 손에 꼭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탁 놓고는 투명한 컵에 3분의 1쯤 남아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다급히 빨아들였다. 빈 컵을 퇴식구에 두고 카페를 나서는 걸음이 쟀다.
회사로 돌아온 여름은 쉽사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배가 고파 그런가 하고는 제 서랍 안의 편의점을 털어 조용한 사무실에서 먹기에 소리가 잘 나지 않으면서 먹으면 금세 든든해지는 파이류와 질겅질겅 이로 씹는 동안 잠은 깨고 약간의 집중력도 발휘되는 젤리류 간식을 먹었다. 그러나 파이를 먹고 젤리를 먹고 난 후에도 일에 집중하는 게 쉽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아직 3시니 퇴근하려면 멀었는데. 벌써 ‘월루(월급 루팡)’ 타임이라니. 근면 성실한 K-직장인답게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데 죄책감마저 느끼는 여름의 머리에는 카페에서 알아보던 것들이 떠오르길 반복했다.
여름은 결국 4시 반쯤 아무래도 복잡한 머릿속을 어쩌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이 안 될 땐 탕비실이든 화장실이든 옥상이든 일어나서 몇 걸음이라도 걸어 다녀오는 게 환기가 된다. 여름은 정작 일어나서는 어딜 갈까 싶다가, 며칠 전 탕비실에 저당 약과며 솔트 캐러멜 등 새로운 간식과 다크한 풍미로 유명한 브랜드의 봉지 커피가 들어온 걸 기억해 냈다. 이미 서랍 속 간식을 축냈지만, 새로운 달달구리로 당 충전을 하고 진한 커피를 한 잔 타 마시면 퇴근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나마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힘들 때인지, 탕비실엔 누가 먼저 와 있었다. 뒤에서 여름이 들어오는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스마트폰 인스타그램 화면을 보는 데 집중하는 이는 마케팅부에 새로 온 마케터였다. 여름은 어쩔까, 싶었다. 잠시 정신을 환기하고 싶었는데. 그러나 정신없는 와중에 짬을 내서 쉬는 동료의 휴식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자리로 돌아가려던 여름의 눈에 마케터의 인스타그램 화면이 들어왔다. 그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해서 스크롤을 올리며 보인 링크 광고 화면에는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언뜻 ‘도서주택’이라고 쓰인 것 같았다. 뭐지, 그게? 도서주택이라니, 도서라는 거야? 주택이란 거야? 책 광고인가? 호기심이 일었지만, 남의 휴대폰을 훔쳐보는 것 같아서 내키지 않은 여름은 몸을 돌려 탕비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