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주택_책 속의 여름

1부. 여름. -9

by sari 고나희

도서주택 청약 신청 준비를 마치고도 하루를 좀 더 고민과 생각으로 보낸 여름은 드디어 결심이 선 2087년 4월 22일,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 대한 한글 파일 약 3장의 에세이를 첨부하며 청약 신청 탭을 클릭했다. 800 대 1의 엄청나게 높지도 낮지도 않은 경쟁률을 뚫고 입주자가 되는 기쁨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해가 바뀌고, 입주일이 다가오자, 여름은 결국 받아놓은 날은 온다는 외할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2088년 10월 22일 여름은 북텍클 청약 센터로 갔다.

안내 문자를 받은 대로 그녀를 상담해 줄 담당자인 이선희 과장의 자리를 찾았고, 순번 대기표를 뽑아 들고 이 과장 근처에 있는 대기 소파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렸다. 이 과장은 바빠 보였지만 손이 빨라 보였다. 어렵고 복잡한 서류를 척척 순서에 맞춰 빠르게 보고 데조하며 내담자에게 설명하는 게 보였다. 지쳐 보였지만, 도서주택 입주에 대해 내담자에게 분명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었다. 일을 잘하는 거 같네, 여름은 생각했다. 그녀는 차례를 기다리며 이 과장이 자기 앞의 순번 내담자에게 설명하는 바를 유심히 보고 들었다. 앞의 내담자처럼 도서주택에 입주할 입장이기도 했고, 자기 일에 성실하여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사람을 여름은 좋아했다. 그런 사람을 보고 대하는 게 즐거웠다. 여름 본인이 그런 사람이었다.

“이렇다니까. 일 좀 잘한다 싶으면 그만둔다니까. 왜들 이러는지. 한(여름) 대리, 승진 예정자잖아. 연봉도 더 오를 텐데, 퇴사라니. 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래, 한 대리 지쳤을 수 있어. 최근 업무 강도 높았던 거 알아, 인정. 시간 선택제 근무 신청하면 어때? 퇴사는 안 돼. 그러지 마. 안 들은 걸로 할게.”

“아니에요. 업무 때문 아니고요. 무슨 일도 없어요. 그런데 퇴사는 해야 해요. 개인적인 계획이 있어요. 일찍 말씀드리잖아요. 후임자 구하실 시간 충분할 거예요.”

“……”

회사도 그녀 앞의 전여진 이사에게도 여름의 퇴사는 갑작스러울 수 있다. 그래도 여름은 퇴사를 물리겠다는 말도, ‘죄송하지만’ 따위의 마음에 없는 말도 하진 않았다. 전 이사에게 한 말은 사실이었다. 업무 강도가 낮은 건 아니나 여름은 이제 그런 것쯤 조정할 수 있는 연차였다. 회사나 여름의 직무와 관련된 특별한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름은 그저 도서주택에 입주할 마음을 굳혔으니 퇴사해야 했다.

그녀는 아빠와 오래도록 대치했다. 성장 과정 내내 불행이 함께한 건 아니었지만, 자주 억울했고, 아픔이 가까이 있다고 여기는 순간이 많았다. 다정한 엄마가 여름 삶의 많은 부분을 행복하게 느끼도록 해주었고, 덕분인지 여름의 유사 불행은 겉으로 쉬 드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꽤 자주 흔들리던 삶을, 아프고 지난하던 시간을 마치 남의 일처럼 생각하기도, 애써 잊기도 했다. 그렇게만 지나쳐갈 수 있었다면, 있던 일을 없던 일로 여기고 살아갈 수 있었다면, 나는 여기에 있지 않겠지, 여름은 생각했다.

“748번 고객님!”

한동안 전 이사와의 대화와 지난 가족사를 상기하던 여름은 자기 차례를 알리는 번호를 부르는 도서주택 청약센터 담당자, 이선희 과장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몇 초간 마음과 머릿속을 가다듬은 여름은 이내 이 과장 앞으로 다가가 앉았다. 앞 순번 내담자와 같이 성실하고 알기 쉬운 언어로 도서주택 입주에 대한 설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갈 때쯤, 이 과장이 여름에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어요? 1년 동안은 책 밖으로 나오실 수 없어요. 책 밖의 세상과 연결되거나 이쪽으로 연락하실 수도 없고요.”

선을 넘지 않는, 예의 바르고 조심스러운 염려를 담은 질문은 앞 순번 내담자에게도 주어졌었다. 청약 공모에도 나와 있던 내용이지만, 사려 깊은 담당자로서 재차 확인하는 것일 테다. 여름은 그 질문이 자신에게도 올 줄 알았단 듯 가볍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네, 괜찮아요.”

바라던 바니까 괜찮았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책이었고, 아빠가 지긋지긋했다. 딸과 사이가 가까운 다정한 엄마가 걱정되지만, 1년이었다. 평생이 아니니까. 인생에서 이 정도의 시간쯤은 떨어져 있어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1년 뒤에 엄마 앞에 더 나은 모습으로 선다면, 엄마가 딸의 웃음을 더 자주 대할 수 있게 된다면 그간 딸을 대하지 못하는 엄마의 마음에도 위로가 될 거란 믿음이 여름에게 있었다. 1년 뒤 어쩌면 어떤 모습으로든 달라진 자신이 엄마에게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빠가 달라지지는 않더라도, 그를 대하고 그에게 대응하는 여름은 달라질 수 있으니까. 여름은 자신에게 기대를 걸었다.

“네, 그럼, 여기 사인해 주세요. 아시다시피 첫 청약이고, 이제 막 입주가 시작된 거라서 도서주택에 입주한 분은 있지만, 도서주택에서 나온 분은 없어요. 그 점은 잘 알고 계시죠? 뭐, 위험하다기보다는 사실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물어보시는 분도 있거든요.”

“네, 알아요.”

“그럼, 입주 잘하시고, 도서주택에서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아, 그리고 도서주택에 짧게 머무실 수도 있어요. 일주일이나 한 달 정도로. 1년간 머무시고 좋으셨다면, 다음에는 더 짧은 기간도 한 번 고려해 보세요. 기존 청약 당첨자는 다음 청약에 선순위를 받으시는 게 도서주택이 일반적인 주택 청약과는 다른 점이기도 하거든요.”

“그렇게 짧은 기간 임대 신청하는 사람도 있을까요? 굳이 임대하고선 그렇게 짧게, 뭐 하러……. 아깝잖아요. 들인 시간이며, 알아본 노력이며.”

여름의 말에 이 과장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리프레시 휴가의 일종으로 그렇게 신청하신 분도 꽤 많아요. 특히 30~40대 입주자 중에는 일주일 임대를 신청하신 분들의 비율이 40% 정도이니, 꽤 높죠? 짧아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으니 그런 거 같아요. 책이 그렇잖아요. 책을 읽는 여행이라고들 하는데, 여행에서의 하루를 일상에서의 1년에 비유하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책으로의 여행은 그 기간에 비해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 같고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뭔가 결의에 차서 단호하게 어딘가로 떠나버린다고만 생각했는데, 여행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여름의 마음은 이 과장의 말에 한결 가벼워졌다. 여름은 자기가 너무 결의에 불탔던 거 같아 민망했다. 그는 좀 더 편해진 마음으로 가족에게 회사에서 1년간 연수를 간다고 했다. 커리어에 더욱 다양한 기회가 있을 거였고, 신청자가 많아 선정되기 어려운데 운이 좋았다고 전했다. 엄마와 아빠 모두 딸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황하고 놀랐지만, 1년 정도의 기간과 자녀의 일과 삶에 중요한 기회라는 데 어렵지 않게 설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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