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여름. -8
여름은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고 있다. 그녀 앞에는 걸어도걸어도 금빛 모래가 답답하게 반복되고, 까끌까끌한 모래를 머금은 불친절한 바람이 가득한 무정한 사막처럼 새하얗게 빈 한글 파일에 눈치 없는 커서만 깜빡이고 있었다. 얼른 채워서 제출해야 하는데. 여름의 마음은 급했다. 도서주택 청약 신청 기간이 이틀 뒤 마감이었다. 아오. 여름은 약간의 긴장을 머금은 초조함과 짜증을 느꼈다. 이 카페에 온 지 1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두 잔 마시고, 당근 케이크를 퍼먹어 체내 당수치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며 에세이를 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도 허연 화면과 살벌하게 대치하고 있다니. 별수 없이 다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기로 했다. 오늘 잠은 다 잤군. 자포자기하며 다시 채워진 잔을 옆에 두고 눈앞에 하얗게 빈 화면을 한 자 한 자 더디게 채워 갔다.
여름이 선택한 책은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주인공 한탸에게 많은 부분 공감했기 때문이다. 자기 일에 성취감과 만족을 가진다는 점에서, (사회적 혹은 가족적) 관계에서 불안과 억울함을 느낀다는 점에서 여름과 한탸는 삶의 주요 지점이 닮아 있었다. 여름은 1960년대 체코의 시대적·사회적 흐름에 무력했던 한탸가, 어둡고 더러운 지하에서 일하고 외로운 집으로 돌아가는 그의 삶에 머물며 대하고 싶었다. 누구에게나 양면이 있다. 어떤 삶에도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담긴다. 한탸에게는 어떤 삶의 양면이 공존했을지, 여름 자신에게 행복과 불행의 좌표는 무엇일지 가늠하고 싶었다. 불행한 장면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얻고 싶었다. 한 자 한 자 더 이상 외면하고 싶지 않은 여름의 바람이 답답하게 이어졌던 모래사막을 채워 갔다.
여름은 한탸의 작업에도 공감했다. 그가 《너무 시끄러운 고독》에서 반복적으로 폐지 중 일부를 선택하여 꾸러미를 만들고 꾸러미를 명화 등으로 감싸서(책의 표지처럼) 보관하는 것이 북에디터와 북디자이너가 책을 기획편집하고 디자인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책을 좋아해서 늘 책을 곁에 두고 싶고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북디자이너가 된 여름은 그래서 이 작품이 아름답고 울림을 준다고 여겼다.
그렇게 여름은 한탸의 성향, 작업, 삶에 대한 공감에서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선택한 거였다. 그녀는 에세이에 수사를 최대한 배제했고, 뺄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빼서 담백하게 적고자 했다(뺄 수 있다면 주어도 빼야 한다고, 더욱 담백하고 정말 중요한 게 남을 수 있도록. 회사 동료 문학팀 북에디터 김라연 팀장이 언젠가 작가에게 주는 피드백에 관해 스치듯 이야기한 것을 여름은 머릿속에 메모해 두곤 글을 쓸 때마다 참고했다). 그런 한편 한탸의 인물 설정을 남자에서 여자로, 폐지 압축공에서 도서관 폐기 도서를 분류하는 사서로 바꾸었다. 일인칭 시점을 선택하고, 임대 기간을 1년으로 설정했다. 당연하게도 소설의 결말인 거대한 폐지 압축기로 들어가는 설정은 변경될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여름은 책 밖으로 돌아와야 했으므로. 그녀가 아끼는 삶과 엄마가 있는 곳으로. 여름이 책에서의 시간을 선택했다고, 책 밖의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책 밖에서 잘 살기 위해 책에서 살아보려는 것이었다.
여름은 어느새 꽉 찬 화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창밖으로 까만 밤하늘을 보며 키보드에 손을 놓았었는데, 더디게 일정한 리듬으로 키보드를 타던 손놀림이 멈추었을 때는 창밖에 새벽빛이 들고 있었다. 하얗게 텅 비어 있던 한글 파일이 새까만 글자들로 채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