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에세이스트의 기록
이따금 나는 일부러 나의 옛 동네를 찾는다. 내가 다녔던 서울 연희 초등학교가 있던 곳. 하지만 학교는 없다. 그 자리에는 차가운 유리와 금속으로 지어진 ‘국립 서부권 치매 안심 센터’가 서 있을 뿐이다. 흙먼지 날리던 운동장은 노인들의 ‘인지 산책로’로 바뀌었다. 센터 정문에서 AI 경비 시스템이 나를 막아선다. “등록되지 않은 방문객입니다.” 나는 내 유년의 공간에서 추방당했다.
연희초 운동장은 이제 평평한 콘크리트 광장으로 바뀌었고, 그 위를 걷는 노인들은 모두 AI 경로 안내에 따라 정해진 루트를 순서대로 돌고 있었다. 내가 뛰어놀던 골목은 안전 센서와 안내 로봇으로 가득했고, 웃음소리는 모두 사라졌다. 도시가 내 기억을 거부하는 것 같았다. 운동장 귀퉁이에 아직 남아 있는 낡은 벤치만이 유일하게 그 시절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곳에 앉아 숨을 고르던 어린 시절의 내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이러한 공간의 전유는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나는 홍대 거리를 거닐었다. 내가 처음 기타를 쳤던 작은 카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최고급 실버타운’ 홍보판만 덩그러니 남았다. 밤마다 인공 조명 아래서 중년층의 댄스 교실이 열린다.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던 작은 골목길의 낡은 카페들은 모두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인지력 향상’을 위한 두뇌 게임방이나 ‘치료식’ 전문 식당이 들어섰다. 강남의 청소년 문화센터 자리에는 최고급 실버타운이 들어섰다. TV 광고에서는 “자녀에게 물려줄 것은 유산이지, 부양의 짐이 아닙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행복한 노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리적인 공간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디지털 기억조차 삭제되고 있다. 2020년대의 소셜 미디어 서비스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살아남은 검색 엔진은 노인 인구의 관심사에 맞춰 최적화되어 있다. 나는 호기심에 검색창에 내 이름을 입력했다. 관련 기록은 2050년 기준 노인용 콘텐츠로만 채워졌다. 학창 시절의 그룹 채팅 기록, 친구들과 주고받던 의미 없는 게시물, 젊은 시절의 열정이 담긴 사진들은 모두 시스템의 정화 작업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마치 과거의 내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AI 추천 알고리즘은 이제 '추억'이라는 단어 대신 '치매 예방'이라는 키워드를 먼저 제시한다. 친구 민수의 기록을 찾으려 했지만, AI는 ‘존재하지 않음’이라고 답했다. 그의 기록은 왜 삭제되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도시가 내 과거를 지워버렸다면, 나는 앞으로 무엇을 기억하며 살아야 하는가?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 만들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젊은 세대가 설 땅을 잃었을 때, 그들은 단순히 공간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었다. 도시는 과거와 단절된 채, 두 세대 사이의 간극을 영원히 벌려놓고 있었다.
도시는 기억의 저장고다. 그러나 다음 세대를 위한 공간을 지우고, 이전 세대의 마지막을 관리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도시는 기억을 잃어버린 환자와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옆에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가족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흔적을 남길 땅을 잃어버린 채, 이 거대한 요양 도시의 유령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의 기록이 2050년의 침묵에 대한 것이라면, 그 기원은 반드시 25년 전, 그 소란했던 시대를 해부해야만 했다. 2025년의 대한민국을 지배했던 단 하나의 감정은 ‘불안’이었다. 그것은 안개처럼 도시 전체를 감싸고, 사람들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만성적인 열병이었다.
열병의 가장 뜨거운 진원지는 단연 부동산이었다.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 중산층 연 소득의 25배 돌파’. 이 숫자는 성실한 노동의 가치가 붕괴했음을 알리는 사망 선고였다. 집 없는 자들은 벼락거지가 되어가고, 가진 자들은 더 많은 것을 쥐기 위해 광분했다. ‘이번 생에 내 집 마련은 불가능하다’는 절망과 ‘이러다 평생 뒤처진다’는 공포가 뒤섞여 ‘영끌’이라는 기이한 광풍을 만들어냈다. 거리를 걷는데, 모든 빌딩 창에 ‘분양 중’이라는 붉은 글씨가 깜박였다. 마치 도시 전체가 나에게 ‘포기하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내 친구 민준이는 4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 서류에 서명하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그러셨어. 집은 자식이 아니라, 부모가 해줘야 하는 거라고. 평생을 모아도 이제는 안 된대. 내가 이 빚을 갚는 동안은 부모님을 부양하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가 생겼어.” 그의 눈에는 안도와 절망이 함께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집에 돌아와 새벽까지 자격증 시험 문제집을 들여다봤다. ‘나도 언젠가 민준이처럼 되겠지’하는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불안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 심장이 끊임없이 두근거렸다. 이 도시 전체가 발열한 몸처럼 느껴졌다. 불안은 노동 시장의 붕괴와 맞물려 증폭되었다. ‘평생직장’은 유물이 되었고, AI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공포를 심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동이 아닌 ‘투자’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너도나도 주식과 암호화폐 시장에 뛰어들었다. 밥을 굶는 대신 코인 투자를 하는 ‘짠테크’가 유행했고, 다 마신 컵에 정수기 물을 채워 나가는 사람들이 늘었다. 나 역시 푼돈을 모아 암호화폐에 투자했다가 작은 손실을 보고 손을 털었다. 손실의 고통보다 더 컸던 것은, 그마저도 나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영역이라는 무력감이었다.
그 불안은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독이었다. 뉴스를 볼 때마다 손이 떨렸고, 머릿속에는 ‘이번 달 월세를 못 내면?’이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맴돌았다. 매일 밤, 나는 침대에 누워 잠 못 이루며 천장을 바라봤다. 식욕은 사라졌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짐처럼 느껴졌다. 친구와의 약속을 취소하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 하루를 소비하는 날이 늘어갔다. 미래를 위한 계획은 무의미했다. 우리는 더 이상 5년 후, 10년 후를 꿈꾸지 않았다. 그저 내일의 불안을 어떻게든 견뎌내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이런 불안은 언어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세대 간의 벽을 세웠다. 추석 식탁에서 큰아버지는 “우리 때는 악착같이 일해서 집도 사고 자식들 대학도 다 보냈어.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쉽게 포기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버티던 사촌 동생이 “저희는 포기한 게 아니라, 시작할 기회조차 없었어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었잖아요”라고 맞섰다. 한때 화목했던 가족의 식탁은 '노력 신화'를 믿는 기성세대와 '구조적 절망'을 외치는 청년 세대의 최전선이 되어버렸다.
이런 사회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은 가장 어리석고 위험한 투자가 되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아이 한 명 양육비 3억 8천만 원’이라는 숫자는, 그 자체로 완벽한 피임약이었다. 출산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감당 불가능한 리스크를 떠안는 비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내 친구 준호는 사교육비를 감당하지 못해 자녀를 학원 대신 AI 튜터에 맡겼다. "적어도 AI는 우리 부모 세대처럼 '노력하면 된다'는 헛된 희망을 주지는 않겠지."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체념과 함께 깊은 불안이 서려 있었다. 주변의 많은 지인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그들의 선택은 개인적 결정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무언의 저항처럼 느껴졌다.
모든 것이 불안했다. 의료 시스템의 붕괴는 노년의 건강을, 잦은 정치적 구호와 정책 변화는 사회 안전망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우리의 삶은 거대한 폭풍우 속 작은 배와 같았다. 모두가 구명조끼를 움켜쥐고 있었지만, 누구도 배를 고치거나 항해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다음 세대가 태어날 자리를 스스로 지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