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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고령 사회 Part2

한 에세이스트의 기록

by sarihana

제1장. 관리되는 삶, 소멸하는 도시


나의 직업은 기록하는 일이다. 더 정확히는, 이 거대하고 조용한 도시의 침묵을 해부하고 그 원인을 글로 남기는 일이다. 2050년의 대한민국은 질서정연한 절망 속에서 마지막을 관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 도시의 경제는 더 이상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모든 산업의 목적은 ‘유지’와 ‘관리’다. 나는 ‘감성 데이터 분석가’라는 직업을 가졌었다. 나의 일은 독거노인들에게 보급된 인공지능 스피커가 수집한 대화 패턴을 분석해 그들의 고독감 지수를 산출하고, ‘자살 위험군’을 분류하여 사회복지 로봇의 방문 주기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매일같이 수만 개의 데이터 조각을 분석했다. 어떤 노인은 AI 스피커에게 "오늘 날씨는 어떤가요?"라고 묻고, 10분 뒤 다시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또 다른 노인은 "오늘도 아무도 오지 않네요"라는 문장을 수백 번 중얼거렸다. 이 일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사람들의 삶을 돕는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단지 데이터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감정을 계산하는 기계일 뿐임을 깨달았다. 매일 저녁, 감성 지수를 갱신하며 숫자로 환산되는 인간의 고독을 보면서, 나는 내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기보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영 속에서 유령처럼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만난 한 노인은 내 손을 붙잡고 ‘오늘도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라고 속삭였다. 나는 그의 눈빛을 기록하고 분석할 뿐, 대답할 수 없었다. 오늘 내 분석 결과, 박 노인은 한 달 동안 친구와 대화한 횟수가 0회였다. 나는 보고서를 제출하며 ‘위험군’에 포함시키고, 사회복지 로봇의 방문을 권고했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그의 삶을 침해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우리는 데이터를 관리하지만, 삶 자체는 관리할 수 없었다. 독거노인 박 노인의 고독감 지수는 '위험'이었지만, 그의 AI 스피커는 '오늘의 감성 점수 100점'을 외치고 있었다. 시스템의 허구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곳의 풍경은 빈틈없이 계산되어 있다. 빌딩 숲 사이로 드론들이 윙윙거리며 배달을 나르지만, 그 드론들은 모두 노인 복지센터로 향하는 영양제나 의료 기기들을 싣고 있었다. 퇴근길 지하철역 출구에는 인공지능 안내 로봇이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사람들의 표정과 걸음을 분석하고 있었다. 일부 시민은 그 존재를 의식조차 하지 못하지만, 나는 그 시선이 내 행동 하나하나를 감시한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다. 공원에는 웃음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다. 대신 잔디밭 한쪽에 설치된 스크린에서는 '고독감 지수'가 낮은 노년층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송출된다.


도시는 거대한 유령선처럼 조용했다. 더 이상 길거리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텅 빈 공터에는 AI 로봇의 삐걱거리는 관절음만이 메아리쳤다. 도시에는 음식 냄새, 흙냄새, 사람 냄새가 모두 사라졌다. 모든 공기는 소독된 병원처럼 무균 상태였다. 활기 넘치던 상점가는 문을 닫았고, 그 자리를 메운 낡은 공장들의 기계음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서로의 시선을 피했고, 그들의 발걸음은 생기 없는 리듬에 맞춰져 있었다. 거리에 울리는 것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배달 드론의 윙윙거리는 소리와 AI 안내 로봇의 기계적인 목소리뿐이었다. 이 모든 소음이 모여, 결국은 거대한 침묵을 이루고 있었다.


기술은 오직 통제와 관리를 위해 존재한다. 오늘 오전, AI가 추천한 맞춤형 운동 프로그램을 따르지 않은 78세 노인에게 사회복지 로봇이 방문했다. 그의 하루 기록과 식사, 수면, 혈압 데이터는 이미 중앙 서버에 저장되어 있었고, 작은 ‘위반’ 하나가 곧 보고서로 올라갔다. 국가 R&D 예산의 60%가 노화 지연과 치매 치료 기술에 집중된 지 10년이 넘었다. 혁신은 오직 ‘어떻게 하면 더 적은 비용으로 노년 인구를 관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만 집중된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하고, 낡아가는 것들이 무너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떠받치고 있을 뿐이다.


이 도시의 가장 큰 소음은 정적이다. 인공지능 스피커가 내는 차분한 목소리, 로봇 청소기가 벽을 긁는 미세한 마찰음. 그 모든 소리는 생기 없는 침묵을 더욱 도드라지게 할 뿐이었다.





제2장. 소리 없는 부패


매달 25일, 내 손목의 스마트 밴드는 의무적으로 급여 명세서를 띄운다. 총액 아래로 붉은색 마이너스 숫자들이 선명하다. ‘통합사회 부양세 42.5%’. 내가 한 달 내내 노동한 시간의 절반 가까이는, 내가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의 생존 비용으로 고스란히 이전된다. 명세서의 마지막 줄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귀하의 노고가 건강한 사회를 만듭니다.” 나는 그 문구를 볼 때마다, 마치 내 장기를 적출당하는 듯한 서늘한 무력감에 휩싸인다.


이 차가운 단절은 일상의 모든 풍경에 스며있다. 퇴근길 지하철, 나는 텅 비어있는 노약자석을 외면한다. 그 자리 위로 “어르신 존중은 의무, 양보는 선택”이라는 문구가 적힌 안내판이 빛나고 있었다. 그 자리에 앉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다. 언젠가 한 청년이 피곤에 지쳐 잠시 앉았다가 ‘패륜 청년’으로 낙인찍혔고, 한 노인이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했다가 “제 월급에서 돈 가져가시잖아요. 정당한 거래 아닌가요?”라는 싸늘한 대답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온라인에 떠돈다. 길거리에서 노인과 청년이 서로에게 고의로 어깨를 부딪히고도 사과하지 않는 풍경도 흔해졌다.


우리는 서로를 피한다. 마주치지 않고, 말을 섞지 않는다. 이 사회는 거대한 데이터 감시망으로 운영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침실의 AI 스피커가 내 수면의 질을 분석해 건강 점수를 갱신한다. 칫솔질은 자동 기록되고, 커피 머신은 나의 건강 데이터를 분석해 카페인 섭취량을 제어한다. 출근길의 모든 걸음과 시선은 도시 곳곳에 설치된 센서에 기록된다. 오늘 아침, 내 커피 소비량이 자동 기록되어 보고서에 반영됐다. ‘카페인 과다’라는 평가가 붙었고, 건강 점수가 0.3점 하락했다. 이는 곧 다음 달 보험료 인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공공 주택 신청 점수, 병원 진료 순번, 심지어 배우자 매칭 서비스의 우선순위까지, 우리의 모든 행동은 숫자로 환산되어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


도시는 내 손끝의 숫자를 먹고, 사람들의 삶을 소화하며 점점 단단해진다. 나는 그 속에서 작은 기계 톱니처럼 삐걱거릴 뿐이었다. 오늘 아침, 사회복지 로봇이 방문했지만, 박 노인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기록 속 숫자는 그의 우울 지수가 급상승했다고 보고했지만, 시스템은 '위험 없음'으로 처리했다. 나는 그의 미세한 몸짓과 떨리는 눈빛을 보고 심장이 내려앉았지만, 그 숫자를 채점하듯 제출해야만 했다. 내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숫자가 누군가의 삶을 규정한다는 생각에, 나는 하루 종일 손이 떨렸다. 시민들의 고통을 '분석 대상'으로만 봐야 하는 현실과, 그들의 고독에 공감하는 나의 인간적 감정 사이에서 나는 매일 갈등했다. 익명의 데이터 뒤에 숨겨진 그들의 삶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시스템의 부속품이 되기를 거부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삶의 효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이 사회의 축소판이다. 익명의 게시판에는 “부양세가 아깝지 않은 노인의 행동 양식” 같은 제목의 글이 공공연하게 올라오고, 추천수를 받는다. 노인 채널에서는 “청년 세대 착취를 막는 법”이라는 영상이 인기다.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로, 상대방을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다. 전쟁은 차라리 격렬하다. 이것은 소리 없는 부패다. 사회라는 몸의 혈관 곳곳에 차가운 지방이 쌓여, 더 이상 따뜻한 피가 흐르지 않는 상태. 증오는 그렇게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지독한 생활의 감각으로 우리의 일상을 좀먹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생활의 감각이 결국 우리를 인간이 아닌, 관리되는 자원으로 전락시켰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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