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계절 - 에필로그

길고양이 레오

by sarihana

에필로그: 회색 도시의 정원


몇 번의 계절이 강물처럼 조용히 흘러갔다. 지민의 웹툰 '회색 도시의 정원'은 책으로 출간되었고, 그 수익금의 일부는 지역 동물 보호소에 꾸준히 기부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갤러리를 운영한다는 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의 그림들로 작은 개인전을 열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자신의 가장 어두운 시간을 세상에 내보이는 일은 두려웠지만, 지민은 용기를 냈다.


갤러리 입구, 작은 액자 안에 지민의 손글씨가 담겨 있었다. 「나의 가장 잿빛이었던 날들은, 역설적이게도 나의 작은 정원이 시작된 날들이었습니다. 회색을 지우려 애쓰는 대신, 그 안에 아주 작은 씨앗 하나를 심기로 했습니다. 이 그림들은 그 씨앗이 뿌리내리고, 잎을 틔우고, 마침내 서툰 꽃을 피워낸 시간에 대한 기록입니다.」


전시회 첫날, 갤러리에는 그녀의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온기를 더했다. 특히, 말문을 닫았던 한 아이가 스케치북에 서툴게 고양이 수염을 그리며 처음으로 '야옹' 하고 작은 소리를 내었을 때, 지민은 자신의 잿빛 세상에 처음으로 색이 번지던 그날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다.


전시회를 마치고 나오는 길, 엘리베이터에서 반려동물 문제로 만났던 무뚝뚝한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지민을 힐끗 보더니 퉁명스럽게 한마디 던졌다. "그 시끄러운 고양이, 잘 있나?" 지민은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아주 잘 있어요. 할아버지."


그날 저녁, 그녀는 오랜만에 엄마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엄마, 주말에 시간 괜찮아?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와. 레오가 엄마 보고 싶대." 수화기 너머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조금은 떨리는 듯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갈게. 우리 딸 보러 가야지." 지민은 창밖으로 펼쳐진 도시를 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의 정원은 이제 가장 단단했던 벽을 허물고 있었다.



정원에서 온 목소리들


엄마

약속했던 주말, 초인종 소리에 문을 연 딸의 얼굴이 낯설었다. 예전의 그늘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다 나는 말을 잃었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깨끗한 창가, 벽에 걸린 따뜻한 색감의 그림들, 그리고 딸의 곁에 자연스럽게 앉아있는 두 젊은 친구와 그들 사이를 유유히 거니는 고양이. 딸의 세상은 더 이상 잿빛이 아니었다. 나는 늘 지민이에게 독해져야 한다고,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게 이 험한 세상을 사는 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나는 내가 틀렸음을 깨닫는다. 저 아이에게 필요했던 건 세상을 향해 세우는 날카로운 가시가 아니라, 기댈 수 있는 어깨와 마음을 나눌 온기였다. 저 작은 공간을 보라. 저곳이 바로 내 딸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궈낸 진짜 정원이구나. 미안함과 대견함에 목이 메어왔다. 나는 서툰 솜씨로 깎아 온 과일을 내밀며 겨우 한 마디를 건넸다. "지민아… 집이 참… 따뜻하네." 내가 돌아가는 길, 현관에서 지민이 조용히 말했다. "엄마, 이제 나한테 강해지라고 말 안 해도 돼. 나 이제 괜찮아." 그 말에 나는 대답 대신 지민을 말없이 한 번 꼭 안아주었다. 서툴지만, 그것은 우리 모녀의 가장 진실한 화해의 순간이었다.



수진

나는 가끔 저녁을 먹고 지민 언니의 오피스텔을 올려다본다. 몇 년 전, 처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을 때만 해도 언니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지금, 28층 창가에서 새어 나오는 저 불빛은 도시의 어떤 야경보다도 따뜻하고 단단하게 느껴진다. 언니는 내게 용기를 주었다. "수진 씨도 수진 씨만의 작은 정원을 가꿀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힘입어, 나는 반려동물을 위한 수제 간식을 만드는 작은 온라인 쇼핑몰을 열었다. 언니의 SNS 제목이었던 '회색 도시의 정원'이, 이제 정말 우리 모두의 진짜 정원이 된 거예요. 이제 우리는 오피스텔 옥상에 함께 만든 진짜 정원에서 별을 본다. 언니를 보며 배운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은 빛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김선우

나는 병원 문을 닫고 퇴근하는 길에 종종 지민 씨의 웹툰을 다시 본다. 그녀의 그림에는 이제 슬픔 대신, 슬픔을 통과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은 이해와 온기가 담겨 있다. 얼마 전부터, 나는 그녀와 함께 동물보호소로 향한다. 나는 아픈 동물들의 모습을 세심하게 기록하고, 그녀는 그 동물들이 좋은 가족을 만나 행복해지는 순간을 상상하며 그린다. 스케치북 위로 우리의 손이 스칠 때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가꾼 작은 정원은, 그녀 자신뿐만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작은 씨앗 하나를 심어주고 있었다. 길 잃은 모든 존재는 결국 서로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작지만 소중한 희망의 씨앗을.



레오

차가운 비가 내리던 밤, 다친 발의 통증과 지독한 외로움에 떨고 있을 때 한 여자가 다가왔습니다. 아주 조용하고 깊은 슬픔의 냄새를 가진 사람이었죠. 그녀의 집은 그녀처럼 차갑고 고요했습니다. 저는 그녀가 출구 없는 미로 같은 그림을 그릴 때면 조용히 무릎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세상은 아주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을 위해 따뜻한 수프를 끓였습니다. 그날,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주 오랜만에 슬픔의 냄새가 아닌 따뜻한 음식 냄새가 났습니다. 또 어느 날엔, 그녀와 가장 닮은 슬픔의 냄새를 가졌던 그녀의 엄마라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마주 앉아 과일을 먹을 때, 아주 오래 묵은 슬픔의 냄새가 조금씩 옅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가장 큰 위기는 제게 찾아왔습니다. 아픈 몸으로 길을 잃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저 멀리서 제 이름을 부르는 애타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기적은 그녀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그림을 보고 마음을 나눠준 따뜻한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낸 기적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봄이 왔습니다. 저는 건강을 되찾았고,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그림자에 살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녀의 작은 방을 넘어, 도시의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진짜 정원으로 갑니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마침내 그들만의 작은 정원이 완성되었습니다. 잿빛 시멘트 바닥 위로 피어난 초록의 생명들. 지민이 서툰 솜씨로 구워 온 바질 페스토 파니니를 나누어 먹으며, 세 사람은 나란히 앉아 자신들이 만든 작은 기적을 바라보았습니다. 제가 지민의 무릎 위로 올라와 부드럽게 머리를 비볐습니다. 삭막한 빌딩 숲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지만, 주변 아파트에서 새어 나오는 저녁 짓는 냄새와 아이들의 웃음소리, 기분 좋은 대화 소리가 뒤섞여 그들의 작은 정원 위로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희망찬 빛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 회색 도시 속 우리가 함께 가꾼 작은 정원에서, 우리의 계절은 끝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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