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계절 Part2

길고양이 레오

by sarihana

제2부: 작은 온기, 옅은 그림자


레오의 존재는 지민의 잿빛 공간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차가운 가죽 소파 위에는 레오가 할퀸 자국과 함께 포근한 담요가 놓였고, 먼지 쌓인 창틀에는 작은 바질 화분이 자리를 잡았다. 퀴퀴하던 먼지 냄새 대신 싱그러운 허브 향과 고소한 사료 냄새가 공간을 메웠고, 숨 막히는 정적은 레오의 나른한 가르랑거림으로 채워졌다.


지민은 더 이상 출구 없는 미로를 그리지 않았다. 어느 오후, 창가 햇살 아래 식빵처럼 몸을 말고 잠든 레오의 모습에 이끌려 스케치북을 펼쳤다. 잠결에 살짝 떨리는 귀,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는 작은 배,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수염 한 올 한 올. 그녀는 숨을 죽이고 연필을 움직였다. 복잡한 선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의 단순하고 따뜻한 곡선을 그리는 행위는 명상과도 같았다. 그녀에게 창문은 더 이상 단절의 벽이 아닌, 레오라는 작은 세상을 담는 따스한 액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벨이 날카롭게 정적을 갈랐다. 액정에 뜬 '엄마'라는 두 글자에 심장이 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여보세요."

"지민아, 잘 지내니? 밥은… 먹고 다니는 거야? 네 아빠가 너 요즘 통 연락이 없다고 걱정하잖니."

"…그냥, 잘 지내."

"그러지 말고 주말에 집에 한번 오렴. 얼굴 본 지가 언제니. 재원이 일은 이제 그만 잊을 때도 됐잖아. 언제까지 그렇게 방문 걸어 잠그고 살 거야. 사람은 좀 독해져야 사는 게 편하단다."


엄마의 서툰 위로는 비수가 되어 날아와 박혔다. 전화를 끊은 지민은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재원이라는 이름이 귓가에 다시 한번 못처럼 박혔다. 2년 전 그날의 기억이 날카로운 파편처럼 떠올랐다.


그날은 지민이 밤새워 그린 그림을 재원에게 처음 보여준 날이었다. 달빛 아래 홀로 선 겨울나무. 지민은 그 쓸쓸함 속에 깃든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재원은 스케치북을 가볍게 훑어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넌 맨날 왜 이렇게 어둡고 삐딱한 것만 그려? 네 그림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어. 사람이 좀 밝아야지.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그녀의 세계를, 그녀 자신을 ‘예민함’이라는 단어로 손쉽게 재단하던 그의 차가운 눈빛이 바로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애써 쌓아 올렸던 작은 온기가 순식간에 식어버리는 듯 심장께가 서늘해졌다. 핏기가 가시는 손끝이 저릿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협탁 서랍으로 향하던 손을 멈췄다. 서랍 속 하얀 약통이 그녀를 유혹하는 듯했다. 그때, 발치에서 '야옹' 하는 부드러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레오가 그녀의 다리에 제 몸을 비비고 있었다. 지민은 천천히 몸을 숙여 레오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 레오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가까스로 눈물을 삼킨 그녀는, 문득 뿌연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참 만에 걸레를 찾아들었다. 켜켜이 쌓인 먼지를 닦아내자, 흐릿했던 도시의 불빛이 조금 더 선명하게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완벽하진 않아도, 아주 조금은 세상이 달리 보였다.


며칠 뒤, 지민은 레오의 예방접종을 위해 다시 김선우를 찾았다. 진료를 마친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민 씨, 혹시 그림 그리세요? 지난번에 보니 손에 연필 자국이 있으시던데."

"…네. 그냥… 취미로요."

"저도 그림 보는 거 좋아해요."


그는 진료실 한편의 사진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저 녀석 이름이 '봄'이었어요. 제가 수의대 시험에 떨어지고 방황할 때, 저 녀석이 일주일 내내 제 옆을 떠나지 않고 밥도 굶더라고요. 덕분에 정신 차렸죠. 지민 씨 그림은… 어쩐지 그런 온기를 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분명, 따뜻할 거예요."


그의 시선이 잠시 지민에게 머물렀다.


"슬픔을 아는 사람의 그림은, 결국 따뜻하더라고요."


그의 말에 지민은 자신도 모르게 2년 전 재원의 차가운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기억 위로, 선우의 말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자신의 세계를 비난이 아닌 이해의 시선으로 바라봐 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지민은 처음으로 낯선 사람 앞에서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얼어붙었던 마음의 한구석이 아주 조금,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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