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령이었다.
궂은비는 그치지 않고 진눈깨비가 되어 우리를 할퀴었다. 밤과 낮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야간 근무가 끝나고 쪽잠을 자고 일어나면 다시 주간 근무가 시작되는 날들이 며칠째 이어졌다. 수면 부족으로 뇌에 낀 안개가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고, 평소에는 들리지도 않던 수액 펌프의 미세한 작동음이 송곳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병동의 복도는 우리의 지친 걸음 아래서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했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우리의 신경은 끊어지기 직전의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어느 날은 억지를 부리는 환자 보호자를 응대하느라 30분 넘게 진땀을 뺐다. 겨우 상황을 정리하고 돌아오자, 선배가 "왜 이렇게 일 처리가 늦냐"며 모두 앞에서 타박을 주었다. 10시간 만에 겨우 먹으려던 늦은 식사는, 민지 선배가 "나 커피 좀 타와라"는 말 한마디로 중단되기 일쑤였다. 그 순간 나는 간호사가 아니라 이름 없는 하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런 소소하지만 잔인한 폭력들이 칼날이 되어 매일같이 우리의 영혼을 저몄다.
그날 밤, 인계 시간을 불과 10분 남겨둔 시점이었다. 갑자기 801호의 바이탈 모니터가 경고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수술실로 바로 내려야 해!" 의사의 외침과 함께 병동은 다시 전쟁터가 되었다.
"거기 신입 둘! 뭐 해, 빨리 이송 베드 붙여!"
선배의 고함에 나와 수현은 정신없이 이송용 침대를 환자에게 밀어붙였다. 환자의 거친 숨소리, 울부짖는 아내, 그리고 질주하는 심장. 그 모든 것이 뒤엉켜 내 손가락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이 손이 내 손이 맞나?' 우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수액과 모니터를 옮겨 달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1분 1초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아수라장 속에서 민지 선배가 수액 줄이 꼬인 것을 보고는 내 귓가에 얼음처럼 차가운 한마디를 던졌다. "넌 진짜... 도움이 안 되는구나." 결정타였다. 그 한마디에 내 안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다.
응급 이송이 끝나고 스테이션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모두 탈진한 상태였다. 그 누구도 서로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날 함께 근무하던 동기 지나가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수현에게 쏘아붙였다. 그녀 역시 손을 떨며 간신히 차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박수현, 너 때문에 지금 인계 시간 다 늦어지는 거 안 보여? 우리까지 피해 봐야겠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보다 공포가 더 짙게 배어 있었다. 이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보다 더 약한 누군가를 탓해야만 버틸 수 있다는 절박함이. 극한의 스트레스는 연대감 대신 가장 약한 동료를 제물로 삼게 만들고 있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필사적으로 서로를 붙잡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비상계단에서 5분 만에 김밥 한 줄을 나눠 먹었고, 퇴근 후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서로의 집에 들러 쪽잠을 자며 다음 날 외워야 할 것들을 함께 공부했다. 그날 밤, 나는 텅 빈 병실 창가에 홀로 서서 밖을 내다보는 지은 선배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작게 혼잣말을 했다. "또 시작이네… 지긋지긋하게." 그 목소리에는 단순한 피로가 아닌, 끔찍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지켜보는 자의 깊은 환멸이 담겨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수현이 차팅 실수로 복도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은 채 수간호사에게 혼나고 있었다. "네가 이러고도 간호사야? 학교에서 뭘 배운 거야!" 모욕적인 언사가 병동 전체에 울려 퍼졌다.
수간호사의 고함은 잔인했지만, 더 잔인한 것은 다른 이들의 침묵이었다. 못 본 척 외면하는 시선들, 동정심조차 거세된 무표정한 얼굴들. 그 침묵은 암묵적인 동의였다. 저 폭력을, 우리 모두가 용인하고 있다는 끔찍한 증거였다. 나는 깨달았다. 이 지옥의 진짜 공포는 몇몇의 가해자가 내지르는 고함이 아니라, 다수의 방관자가 만들어내는 이 거대한 침묵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발을 떼지 못하는 나 역시 그 침묵의 공범이었다.
울음을 삼키느라 잘게 떨리는 수현의 어깨를 보며, 얼마 전 나의 실수가 그녀에게 더 큰 짐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다른 간호사들은 못 본 척 제 할 일을 했고, 몇몇은 고개를 돌리며 작게 혀를 찼다. 환자 보호자들까지 복도를 지나며 힐끔거렸다. 그들의 침묵과 경멸 어린 시선이 수간호사의 고함보다 더 날카롭게 수현의 존엄을 베어냈다.
잠시 후, 화장실 칸막이 안에서 소리 죽여 우는 수현의 손에 몰래 챙겨 온 초코바를 쥐여주었다. 수현은 눈물을 쏟아내며 초코바를 베어 물었다. "희진아... 너무 힘들어... 나... 사람이 아닌 것 같아..." 그녀의 속에서 억눌렸던 무언가가 마침내 터져 나왔다. '왜 나한테만 그래?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당신들은 처음부터 완벽했어? 나도 잘하고 싶다고!' 차마 밖으로 내뱉지 못한 분노가 그녀의 눈물에 섞여 흘러내렸다.
그날 밤, 수현은 말이 없었다. 그저 침대에 누워 텅 빈 눈으로 천장만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곁에 앉아 조심스럽게 말했다. "수현아, 그래도 힘내자. 우리가 서로 의지하면 이겨낼 수 있어."
내 말에, 수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 눈빛에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가운 원망이 서려 있었다. "너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 희진아. 너는 나보다 강하잖아. 선배들도 너는 함부로 못 건드려. 무릎 꿇은 건 난데, 버티자는 말이 참 쉽게 나온다."
그녀의 말은 얼음 조각이 되어 내 심장에 박혔다. 그녀가 옳았다. 무릎 꿇은 것은 내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 나의 위로는 더 이상 연대가 아닌, 상처받지 않은 자의 오만한 동정으로 비쳤을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의 공유된 고통이 더 이상 우리를 묶어주는 다리가 아니라, 서로를 갈라놓는 벽이 되어버린 순간이었다.
그날 새벽, 근무를 마치고 고시원이나 다름없는 작은 방으로 돌아왔다. 유니폼도 벗지 못한 채 차가운 침대 위로 쓰러졌다. 천장의 희미한 얼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귓가에는 여전히 병원의 기계음과 선배의 날 선 목소리, 그리고 친구의 차가운 목소리가 맴돌았다.
'내가 원했던 간호가 이런 것이었나.'
환자의 손을 잡고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기계보다 차갑게 식어가는 부품일 뿐이었다. 무력감의 독백 속에서 나는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지옥 속에서 서로의 유일한 구원이자,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지 못했다. 가장 거센 비바람은, 때로 가장 단단한 것부터 부러뜨린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의 우산이 찢어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 중 누군가는 비를 피할 다른 처마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