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 움 Part5

나는 유령이었다.

by sarihana

5장. 갈림길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마른 땅이 드러나듯, 병동의 가혹한 분위기 속에서도 미묘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압력에 짓눌린 얼음판 위에 나타난 가느다란 금과 같았다. 우리를 잠시 숨 쉬게 하는 틈이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영원히 둘로 갈라놓을 잔인한 갈림길이었다.


그날 밤, 대형 교통사고로 인한 대량 응급 환자 호출이 병동 전체를 강타했다. '코드 그레이' 경보음, 환자 가족들의 절규, 의사와 선배들의 급박한 지시가 뒤엉켜 복도는 순식간에 '하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혼돈 속에서 나는 환자의 상태에만 집중했지만, 수현은 달랐다. 그녀는 환자를 돌보면서도 동시에 선배들의 동선을 예민하게 살폈다. 민지 선배가 손을 뻗기도 전에 필요한 물품을 건넸고, 의사의 다음 지시를 예측하여 준비했다. 아수라장이 정리된 후, 나는 들었다. 민지 선배가 다른 선배에게 "박수현은 쓸 만하네"라고 말하는 것을. 그 칭찬을 들은 수현의 얼굴에 스친 것은 기쁨이 아닌, 무언가를 팔아넘긴 자의 공허한 안도감이었다. 그 칭찬은 그녀에게는 생존의 증표였고, 내게는 멀어지는 친구의 발소리 같았다.


간신히 상황이 정리된 새벽녘, 탈의실에서 동기 지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퇴사 의사를 밝혔다. "나… 내일까지만 하고 그만둘래." 그녀는 핏기 없는 얼굴로 우리를 보며 말했다. "이곳은 사람을 살리는 곳이 아니야. 사람을 갈아 넣어 돌아가는 공장이야." 그 한마디는 병동의 부조리한 현실을 꿰뚫는 비수 같았다.


상대적으로 눈치가 빠르고 손이 야무졌던 수현은 조금씩 선배들의 생존 법칙을 터득해나가고 있었다. 나는 보았다. 스테이션 한쪽에서 수현이 선배들에게 커피를 타주고 있는 모습을. 그녀의 움직임은 능숙했고, 그녀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 그날 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현아, 네가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수현은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럼 어떡해? 너처럼 매번 부딪히고 혼나면서 버티라고? 이건 그냥 커피가 아니야, 희진아.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라고. 난 그냥… 여기서 살아남고 싶을 뿐이야." '살아남는다'는 그 단어가 우리 사이에 서늘하게 떠다녔다. 우리는 함께 '꿈을 이루자'고 맹세했지, 그저 '살아남자'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이 지옥의 언어를 배우고 있었다.


퇴근 후 함께 공부하던 시간은 줄어들었다. 수현은 "선배들이 불러서…"라며 자리를 피하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텅 빈 자취방에 홀로 남아 컵라면을 먹으며, 그녀가 선배들과 함께 웃으며 식사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우리의 거리는 그렇게, 소리 없이 멀어지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그날 오후, 탕비실에서 찾아왔다. 평소 우리를 가장 심하게 괴롭히던 선배 민지가 커피를 타던 수현에게 다가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나는 청소 도구를 정리하는 척하며, 숨을 죽인 채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박수현, 너는 머리 회전도 빠르고 괜찮은데, 자꾸 저기 이희진이랑 붙어 다니니까 너까지 욕먹는 거야. 쟤는 글렀어. 저렇게 요령 없이 뻣뻣해서 어디다 쓰겠어? 살아남고 싶으면 줄 잘 서야지. 이 바닥은 그래. 잡아먹거나, 잡아먹히거나. 나는 네가 잡아먹는 쪽이 됐으면 좋겠는데."


수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커피잔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민지는 수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잘 생각해. 바보처럼 같이 익사할지, 똑똑하게 혼자 헤엄쳐 나올지. 기회는 내가 줄게."


그날 밤, 당직실의 작은 TV에서 심야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앵커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오늘 새벽,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던 20대 간호사가 병원 기숙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현장에서는 선배 간호사들의 '태움'이라 불리는 직장 내 괴롭힘을 암시하는 유서가 발견되어…"


순간, 나와 수현은 동시에 TV 화면을 쳐다보았다. 내가 먼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현아. 이거… 우리 얘기 같지 않아?" 수현은 대답 없이 핏기 없는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TV 화면 속 '유서 발견'이라는 자막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이것 봐. 이래서 우리가 더 똘똘 뭉쳐야 해. 서로 지켜주지 않으면,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어. 약속했잖아, 우리. 끝까지 함께라고."


수현은 잡힌 손을 빼지는 못했지만, 끝내 내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내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차가운 계산이었다. "…그런데 희진아. 저 사람은… 결국 죽었잖아. 우리가 뭉친다고 뭐가 달라져? 같이 죽는 것 말고, 뭐가 달라지는데?"


그 말을 끝으로 수현은 돌아누웠다. 나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공기 속에서, 친구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병원의 소독약 냄새보다 더 차가웠다.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 하얀 지옥이 이미 내 친구를 반쯤 죽여놓았다는 것을. 아직 숨은 쉬고 있지만, 우리가 함께 꿈을 꾸던 박수현은 이미 죽어버렸다는 것을. 그녀의 영혼을 잠식하고, 그 자리에 생존 본능만 남은 낯선 사람을 앉혀 놓았다는 것을. 나는 이제 정말로, 이 지옥에 홀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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