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밸브
아키라와의 논쟁으로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던 유진은 잠시 바람이라도 쐬기 위해 지휘소를 나섰다. 발전소 단지 구석, 폐기된 자재들이 쌓여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던 그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낡은 임시 천막 하나를 발견했다. 공식 동선 지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의도적으로 감춰진 듯한 공간이었다.
불길한 호기심에 이끌려 천막의 이음새를 살짝 열어 안을 들여다본 순간, 유진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안에는 방호복을 벗은 열댓 명의 근로자들이 간이침대에 힘없이 앉거나 누워 있었다. 그들은 하루 방사선 피폭 허용치를 넘었다는 이유로 작업에서 배제된 채, 다음 지시를 기다리며 그저 격리되어 있을 뿐이었다. 의료진은 보이지 않았고, 낡은 탁자 위에는 생수 몇 병과 포장된 빵 몇 개가 전부였다. 그들은 마치 과열되어 고장 난 기계 부품처럼 이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수치심, 불안, 그리고 누구에게도 향하지 못하는 분노가 뒤섞인 침묵이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 유진이 한 젊은 근로자와 눈이 마주쳤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그의 목덜미에는 방사선 화상으로 인한 붉은 ‘핵 선탠’ 자국이 끔찍할 정도로 선명했다. 젊은 근로자는 유진의 시선을 느끼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마치 자신의 존재가 부끄럽다는 듯이.
그 순간 유진은 깨달았다. 아키라가 신봉하는 그 완벽한 시스템의 이면을. 저들은 시스템이 정한 한계치를 넘었다는 이유로 '오류'로 취급되고 있었다. 아키라의 '효율성'은 이런 희생을 철저히 외면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었다.
유진은 그들의 모습 위로 25년 전, 똑같이 버려졌을 아버지 ‘표트르’의 얼굴을 보았다. 이곳은 체르노빌이 아니었지만, 보이지 않는 유령들은 똑같이 존재했다. 역사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