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조각의 무게
평온하던 혜진의 일상에, 과거의 그림자가 예고 없이 드리워졌다. 전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첫째 선우가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을 어디선가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차갑고 고압적이었다.
“당신 제정신이야? 애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했어? 당신이 일하는 그 식당 같은 데서 평생 고생시키려고? 당장 그딴 거 그만두고 공부나 시켜!”
예전의 혜진이라면 그의 분노 앞에서 숨을 죽이고 주눅이 들어 ‘내가 정말 잘못 생각했나’라며 스스로를 자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달랐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 산 정상에서 발아래 도시를 내려다볼 때처럼 차분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세요. 선우 인생은 선우가 선택하는 거예요. 당신이나 나나, 그 선택을 믿고 지지해줄 의무만 있을 뿐이에요.”
“지지? 멀쩡한 애를 망쳐놓고 무슨 놈의 지지야! 역시 당신 혼자는 안 되겠어. 내가 나서야지.”
며칠 뒤, 그는 예고도 없이 집에 찾아왔다. 손에는 값비싼 입시 컨설팅 서류 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마치 여전히 이 집의 주인인 양 행세하며 혜진과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혜진은 그의 눈에서, 한평생 엄격하고 무서웠던 시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인정받지 못했던, 불안하고 상처받은 소년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 순간, 그에 대한 오랜 두려움이 연민으로 바뀌었고, 그녀는 더 이상 그가 두렵지 않았다.
“이게 이 나라 최고 컨설턴트한테 받아온 계획표다.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시작하면, 의대는 몰라도 이름있는 대학 경영학과는 갈 수 있어. 주방에서 평생 기름 냄새 맡고 살게 할 순 없잖아?”
첫째 선우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숙였다. 아빠의 권위적인 목소리는 아이를 순식간에 과거의 무력했던 소년으로 되돌려 놓았다. 집 안의 공기는 다시 얼어붙었다.
혜진은 조용히 차를 내왔다. 자신이 직접 만든, 비뚤어진 찻잔에.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앉아, 더 이상 피하지 않고 단단해진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나는 이 아이가 평생 기름 냄새를 맡더라도, 행복하게 웃으면서 일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원하는 번듯한 명함 손에 들고, 죽은 표정으로 사는 것보다 그게 백배, 천배는 낫다고 생각해요.”
“행복?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돈이 없는데 어떻게 행복해? 당신이 이혼하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벌써 잊었어?”
“힘들었죠.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덕분에 알게 됐어요. 돈이나 다른 사람의 인정보다, 내 마음이 진짜 원하는 걸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요. 나는 내 아이가 그걸 일찍 알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처럼 평생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방문을 열고 나온 선우가 서류 봉투를 집어 아버지 앞에 돌려주었다.
“아빠, 저 이거 필요 없어요.”
아들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제가 선택한 길이에요. 저는 요리가 좋고, 제가 만든 음식을 사람들이 맛있게 먹어줄 때 심장이 뛰어요. 아빠가 말하는 성공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행복하지 않은 성공은 저한테는 실패나 마찬가지예요.”
아들의 단호한 목소리에 전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아들의 얼굴과 혜진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그는 아무 말도, 그 어떤 작별 인사도 하지 않았다. 과거의 그림자는 그렇게 떠나갔다.
혜진은 아들의 어깨를 말없이 감싸 안았다.
그날 밤, 선우는 자신의 방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실망한 얼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던 어머니의 눈빛이 교차하며 마음이 복잡했다. ‘아버지는 모른다. 내가 그토록 화가 났던 건 요리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존경했던 스승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라는 것을.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그 차가운 모습이 지긋지긋했다. …엄마는 달랐다. 내 칼이 아니라, 내 마음을 먼저 봐주었다.’ 그는 낡은 조리도구 가방을 열어, 가장 아끼던 자신의 첫 칼을 꺼내 숫돌에 갈기 시작했다. 서걱, 서걱. 날카롭고 서늘한 소리가 그의 결심처럼 단단하게 방 안을 채웠다. ‘이제는 정말 내 요리를 해야겠다.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요리가 아니라, 따뜻한 계란말이처럼 누군가를 위로하는 요리를.’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뜨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