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밸브
사진 속의 남자는 분명 아키라였지만, 유진이 아는 그 아키라가 아니었다.
사진은 아마 10년은 더 되었을 법한, 모서리가 닳고 빛에 바랜 폴라로이드였다.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공원을 배경으로, 젊은 아키라는 지금의 날카롭고 강철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세상 모든 행복을 다 가진 듯 눈가에 깊은 주름을 만들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특히 유진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아키라의 미소였다. 그것은 모든 것을 데이터로 환산하고 통제하려는 완벽주의자의 계산된 미소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가족 앞에서 모든 무장을 해제한 한 남자, 한 명의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느낄 수 있는 순수한 기쁨과 안도감이 담긴, 경계심 없는 얼굴이었다.
순간, 그 빛바랜 컬러 사진 속 미소가 다른 이미지와 겹쳐졌다. 유진의 기억 저편, 아주 희미하게 먼지 쌓인 채 남아 있던 아버지 표트르의 젊은 시절 모습이었다. 체르노빌의 악몽이 그의 영혼을 잠식하기 전, 아버지가 어린 자신을 목말을 태우고 웃어주던 단 한 장의 낡은 흑백 사진. 색깔도, 시대도, 배경도 달랐지만 그 사진 속 아버지의 미소와 액자 속 아키라의 미소는 국적과 시대를 뛰어넘어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아직 세상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한 아버지의 얼굴.
유진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는 그 미소를,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결국 모든 진실을 삼키고 희생하며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다면 아키라는? 그는 지금 무엇을 지키기 위해 저토록 자신을 강철 같은 규율과 매뉴얼 속에 가두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의 그 완고함은 세상을 향한 공격이 아니라, 사진 속의 저 미소를, 저 행복을 다시는 잃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방어는 아니었을까.
유진은 처음으로 아키라라는 벽 너머에 있는 한 인간의 슬픈 초상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