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밸브
<러시아 전문가 '드미트리'>
모스크바의 낡은 아파트에서 독한 보드카를 마시며, 나는 창밖으로 끝없이 내리는 눈을 보고 있었다. 내 눈에는 후쿠시마의 죽음의 재와, 25년 전 체르노빌의 방사능 낙진이 겹쳐 보였다.
나는 체르노빌의 '액화 작업인(Liquidator)'이었다. 유진 킴의 아버지처럼, 나 역시 그 지옥의 지붕 위를 걸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고, 살아남기 위해 침묵하는 법을 배웠다.
후쿠시마에서 유진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그의 눈에서 오래전 죽은 내 동료들의 얼굴을 보았다. 원인 모를 고통에 시달리던 아버지에 대해 그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때, 나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치고는 말했다. “과거는 묘지 같은 거야, 젊은이. 똑똑한 사람은 거길 파헤치지 않지.”
하지만 청문회에서 그가 보여준 용기는, 수십 년간 보드카와 냉소주의로 굳어버린 내 심장을 흔들었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침묵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싸웠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했는가. 여전히 그 침묵의 벽 뒤에 숨어, 과거의 망령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서재 가장 깊숙한 곳의 낡은 철제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체르노빌에서 내가 입었던 훈장과 함께, 빛바랜 낡은 수첩이 들어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수첩을 펼쳤다. 그곳에는 피를 토하며 죽어간 동료들의 이름과, 정부가 거짓말로 은폐했던 우리의 진짜 피폭 기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제 이 기록을 세상에 내놓을 때가 되었다. 유진 킴의 아버지, 표트르를 위해. 그리고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나의 사랑하는 동료 미샤를 위해. 더 이상 침묵이라는 이름의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